1864년 9월 26일, 김진림이 안부를 주고받기 위해 사돈인 이현발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64년(고종 1) 9월 26일에 浪坡 金鎭林(1802-1886)이 안부를 주고받기 위해 사돈인 藥坡 李鉉發(1810-1884)에게 보낸 대필 편지이다. 김진림은 자가 士恒, 본관이 의성으로, 생부는 東園 金羲壽이다. 부호군을 받았고, 시집이 있다. 이현발은 자가 台應, 본관이 재령으로, 李壽一의 아들이다. 壽職으로 통정대부 부호군을 받았고, 유집이 있다. 그는 雲嶽 李涵의 주손이다. 그의 장자인 李性浩(1839-1923)가 김진림의 둘째딸인 義城金氏 金又嬌와 혼인했다.
김진림은 가을 초에 앓던 병이 지금 다행히 나아가지만, 이달 열흘에 며느리를 근행 보냈고 지금 또 딸을 浮浦로 보내는 바람에 수하에 졸자가 없고, 한 달 동안에 두 번이나 轎行을 하느라 심력을 소모하였기 때문에 고생스럽다고 했다. 봄에 집을 이건하는 일로 심력을 소모하였고 지금 또 失農했다고 하였다. 서울 소식은 士實(左海 이수영) 형이 내려온다고 하니 꼭 들을 수 있을 것인데 아직 만나지 못했으므로 상세한 것은 모르지만, 지난번에 시끄러웠던 일은 훗날의 염려가 없을 것이라고 다른 데서 들었다고 하였다. 끝으로 玉川의 일은 자신이 듣고 통탄하였다고 했다. 명색이 士子인 자들의 전후 거조가 이와 같이 사리에 어긋나니 따질 것도 없다고 하면서, 이현발의 의향을 물었다. 추신에서는 이현발의 큰손자인 이병칠의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그 필획이 淸健하고 間架가 闊大하니 이와 같이 진취해간다면 장래가 매우 촉망된다고 하면서 기특하고 다행하다고 했다. 붓 한 자루를 보내니 습자를 시켜 달라고 했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간찰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회문의 형식으로,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내용을 기록했다.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