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5월 22일, 김두흠이 반촌에 도착한 후 근황을 알리고 송림원 송사와 잠조 선조의 시호와 관련한 일 등에 관해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63년(철종 14) 5월 22일에 洛厓 金斗欽(1804-1877)이 보낸 편지이다. 발급인 김두흠은 자가 文一, 본관이 豐山이다. 鶴沙 金應祖의 형인 深谷 金慶祖의 후손으로, 鶴南 金重佑의 아들이다. 생부는 金重南이다. 그는 文科와 重試에 급제하고, 관직이 同副承旨에 이르렀다.
김두흠은 집을 떠난 다음날에 비를 무릅쓰고 가서 新院店에 도착하였는데 결국 길이 막혀서 그대로 머물다가 2월 19일에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 도성으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그간에 고생을 겪은 상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하였다. 다행히 일행들은 이렇다 할 병에 걸리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泮村에 전염병이 크게 창궐하지 않았고 성균관에 머물고 있는 여러 친구들도 모두 평안하게 지낸다고 하였다. 김두흠은 松林院의 天水에 관한 일이 어떠한 상황에 이르렀는지 물었다. 朴參判의 서간을 긴히 부탁하여 얻어서 보내니 즉시 老成한 사람 1員을 보내어 이 편지를 전하게 하고 동정을 살펴서 다시 통기하면 자신이 주선하여 기어이 파내겠다고 하였다. 潛祖께서 諡號를 받는 일에 대해서는, 大僚가 임금에게 주청한 바가 이와 같이 정중하였고, 또 文衡을 만나 보았더니, 그가 “머지않아 議諡할 것이므로 諡狀을 속히 가져 오면 자신이 다시 考訂하고 충분히 상의하여 걸 것이다.”고 하였으니 그가 성심으로 이 일을 맡으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다만 永恩(永恩府院君 金汶根)과 훈련대장을 아직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또 마땅히 며칠 후에 會閤을 반드시 만나서 致謝할 생각이라고 하였다. 선조의 諡號를 받기 위해 김두흠이 要路와 적극적으로 접촉하고 또 그들의 협조를 얻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河回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려갔기 때문에 愚川 영감과 서로 의지하며 보내고 있다고 하였다. 우천 영감이란 풍산류씨인 修菴 柳袗의 후손들이 세거하던 상주 우천 출신의 고위 관료를 가리킨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