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1월 13일, 김진림이 여러 가지 안부를 교환하기 위해 사돈인 이현발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62년(철종 13) 1월에 浪坡 金鎭林(1802-1886)이 여러 가지 안부를 교환하기 위해 사돈인 藥坡 李鉉發(1810-1884)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진림은 자가 士恒, 본관이 의성으로, 생부는 東園 金羲壽이다. 부호군을 받았고, 시집이 있다. 이현발은 자가 台應, 본관이 재령으로, 李壽一의 아들이다. 壽職으로 통정대부 부호군을 받았고, 유집이 있다. 그는 雲嶽 李涵의 주손이다. 그의 장자인 李性浩(1839-1923)가 김진림의 둘째딸인 義城金氏 金又嬌와 혼인했다.
먼저 이번에 인편을 얻거나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도가 혹 있었으나 때가 되어 추위가 갑자기 심해져서 움직이시기가 어려우리라 생각되었기에 매우 섭섭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이현발의 조카와 아들을 만나고 또 이현발의 편지를 받게 되니 크게 위안이 되었다고 했으나 이현발이 근래 외가의 상사를 당하고 또 그 슬픔으로 건강을 해친 일에 대하여 걱정스러운 마음을 표했다. 그러면서 잘 조섭하여 건강을 회복했는지 물었다. 딸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여전한 것은 보살펴준 덕택이라고 했으며 이성호가 南州로 간 것에는 부득이한 일이 있어서겠지만 이 추위에 몸을 해칠까봐 걱정스럽다고 했다.
자신은 신부가 집안에 들어와 홀연 새해를 맞은 감회도 잊었다고 했고, 그녀가 음식을 잘해 올린다고 했다. 그러나 아들을 잃은 季父의 지극한 슬픔은 노인이 감당할 바가 아니라서 지켜보는 자들이 위로해드릴 방도가 없고, 川上의 기일도 이르게 되니 고뇌를 떨쳐내기 어렵다고 했다. 이성호의 행실은 자신의 아들과 비하여 월등히 낫다고 했으며, 그가 추운 길을 되돌아갈 일이 매우 염려스럽다고 했다. 3월 무렵에 있을 그와의 만남이 미리 기다려진다고 하고, 추신에서는 그때 딸아이도 데려 와야 할 것 같은데 이현발 측의 사정이 어떤지 등도 물었다.
간찰의 사연이 짧을 경우 상하좌우의 여백이 그대로 남지만, 사연이 다 끝나지 않을 경우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 다음은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으며, 그 다음은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하여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간찰의 경우도 일반적인 간찰이 형식을 따랐다. 회문의 형식으로,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내용을 기록하였고 행간에도 내용을 기록하였다.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