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4월 4일, 김석락이 자신의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이현발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60년(철종 11) 4월 4일에 金奭洛(1821-1895)이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藥坡 李鉉發(1810-1884)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석락은 자가 敬輔, 본관이 의성으로, 金鎭永의 아들이다. 東園 金羲壽의 손자이자, 金鎭健의 친아들이다. 김석락의 부인은 載寧李氏이니, 雲嶽 李涵의 주손인 李壽一의 딸이다. 따라서 김석락은 이수일의 장남인 이현발과는 처남매부지간이다. 이현발은 자가 台應이며, 壽職으로 통정대부 부호군을 받았고, 유집이 있다.
김석락은 偏侍(양친 중 살아 계신 한 분)가 항상 위태로운 지경에 있어 애가 타는 와중에 집사람이 草瘧으로 네다섯 차례 심하게 앓았으며, 친정에 가 있는 며느리가 순산했다는 기별이 없다는 등의 근황을 전하면서 번민을 필설로 전할 수 없다고 했다. 관동 유람을 경영한 지 10여 년이 되었지만 늘 일에 얽매여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또 자신이 가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이현발도 자신을 봐주려는 뜻이 없고, 仲氏인 李鉉德도 龜峴으로 가면서 끝내 자신을 보지 않고 돌아갔다고 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소원하게 했기 때문이므로 남을 탓할 것이 없다고 했다. 舍叔이 객지에서 병이 겹쳐서 이현발 측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는데, 자신은 천연스레 집안에 있으면서 안부를 묻지 않았으니 그지없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추신에서는 叔氏인 李鉉國에게 위문편지를 보냈어야 하는데 황망하여 그러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 한스러운 마음을 전해 달라고 했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간찰의 경우에는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돌려쓰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남아 있는 여백에 내용을 기록했다.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