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년 11월 4일, 김진림이 상사에 직접 조문하지 못하고 들르는 길에 찾아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기 위해 사돈인 이현발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59년(철종 10) 11월 4일에 浪坡 金鎭林(1802-1886)이 상사에 직접 조문하지 못하고 들르는 길에 찾아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기 위해 사돈인 藥坡 李鉉發(1810-1884)에게 보낸 대필 편지이다. 김진림은 자가 士恒, 본관이 의성으로, 생부는 東園 金羲壽이다. 부호군을 받았고, 시집이 있다. 이현발은 자가 台應, 본관이 재령으로, 李壽一의 아들이다. 壽職으로 통정대부 부호군을 받았고, 유집이 있다. 그는 雲嶽 李涵의 주손이다. 그의 장자인 李性浩(1839-1923)가 김진림의 둘째딸인 義城金氏 金又嬌와 혼인했다. 김진림은 당시 龜峴에 거주하고 있었다.
김진림은 지난번 객지에서의 喪報에 매우 놀랐다고 했다. 더구나 외지에서의 治喪과 返櫬에 군색한 점이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姻親의 입장에서 치상하던 날에 달려가 조문했어야 하지만, 부음을 늦게 받았고 숙환이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딸을 보내는 일로 골몰되었다고 했다. 결국 친분이 도타운 관계에 있는 자신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과 같이 처신하였다고 하면서 매우 부끄러웠다고 했다. 또한 南州로의 新行을 잘 치렀다고 했고, 또 탈것을 빌려준 이현발 덕택에 별 탈 없이 수백 리 떨어진 먼 곳을 往返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또 이현발이 말과 종을 보냈던 것은 돌아오는 길에 들르라는 뜻이었겠으나, 그곳에서 많은 일자를 보냈고 돌아올 때에는 부득이한 집안일로 인하여 지레 돌아오고 말았다고 했다. 내년 봄에 가서 뵐 계획이라고 하면서 양해해 주기를 부탁했다. 끝으로 사위가 여러 날 동안 지체되고 있는 까닭, 어린 것들을 데리고 잘 지내고 있는 딸아이가 내년 봄에야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등의 소식을 전했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간찰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회문의 형식으로,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내용을 기록했다.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