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5년 4월 25일, 김진림이 자신의 병 상태와 재난 등을 알리기 위해 사돈인 이현발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55년(철종 6) 4월에 浪坡 金鎭林(1802-1886)이 사돈인 藥坡 李鉉發(1810-1884)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진림은 자가 士恒, 본관이 의성으로, 생부는 東園 金羲壽이다. 부호군을 받았고, 시집이 있다. 이현발은 자가 台應, 본관이 재령으로, 李壽一의 아들이다. 壽職으로 통정대부 부호군을 받았고, 유집이 있다. 그는 雲嶽 李涵의 주손이다. 그의 장자인 李性浩(1839-1923)가 김진림의 둘째딸인 義城金氏 金又嬌와 혼인했다.
김진림은 먼저 이현발의 아들을 만나고 편지를 받아 읽게 되니 병이 몸에서 사라지는 듯하였다고 했다. 이어 지난번 痰結은 잘 조리하였는지 물었다. 자신은 背毒에 白蛤甲을 써보고 있고 面祟에 通聖散을 복용하여 경과를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전신의 浮症이라고 하면서, 노인의 정력으로써는 대적할 길이 없다고 했다. 또한 일전에는 지진이 발생하여 보리가 모조리 땅에 묻히고 채소와 과일도 남김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병이 없는 사람이라도 어찌 먹지 않고 살 턱이 있겠느냐고 하면서 탄식했다.
딸이 우환 중에 파리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면서, 달리 아픈 데가 없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라고 당부했다. 보내준 벼룻돌에 대해 매우 감사했으나 찾아보니 없어져 버렸다고 했다. 사위가 오가면서 심력만 허비하였기에 작별한 즈음에는 이 병든 사람으로 하여금 서글픈 마음을 감당치 못하게 하였다고 했다. 추신에서는 들으니 이현발이 있는 곳에도 지진 피해가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냐고 묻고 액운에 대해서 탄식하였다.
간찰의 사연이 짧을 경우 상하좌우의 여백이 그대로 남지만, 사연이 다 끝나지 않을 경우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 다음은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으며, 그 다음은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하여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다. 이 간찰의 경우에는 우측과 상단에 여백을 많이 두지 않고 내용을 쓰기 시작하였고, 추록은 편지의 처음부분에 기록하고 있다.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