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년 2월 29일, 상임이 당시 안변부사로 있던 유태좌에게 보낸 안부편지
내용 및 특징
1808년 2월 29일, 相任이 당시 安邊府使로 있던 柳台佐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수취인 유이좌(1763-1837)는 자가 士鉉이고, 호는 鶴棲, 본관이 豊山이다. 정조의 명으로 ‘너는 나를 도우라’는 뜻으로 이름을 ‘이좌’로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먼저 남북으로 떨어져 살아 소식을 들을 수가 없어 한갓 수고로이 그리워하고만 있었다고 하였다. 지난겨울 김 의원이 귀부에서 돌아 방문하였는데 한 통의 편지를 전해주어 받고는 감사하고 위로되어 마치 한 번 뵌 것처럼 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다만 인편이 없어 곧바로 답장하지 못했는데 어느덧 해가 바뀌어 봄이 깊으니 그 죄송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냐고 하면서 단아한 도량으로 잘 헤아리시고 가혹한 예로 사람을 꾸짖지 않으시리라 생각됩니다만 우러러 그리운 마음은 또한 편지만큼이나 게으르지는 않다고 하였다. 봄추위가 아직도 찬데 關北은 곱절이나 심하리라 생각된다고 하면서 이러한 때에 정무를 보는 체후를 물어보았다. 자신은 영남에서 경기로 편리하고 가까운 곳을 왕래하는 것이 다행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고을이 이미 피폐하고 올해는 또 흉년을 만나 편안하게 살 방책이 없으니, 이리저리 생각해도 일찍 좋은 사람에게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도리어 다른 본분인 것만 못한데도 또한 임의대로 하지 못하여 날마다 견책만을 기다릴 뿐이라고 하였다. 집안에 병을 아뢰는 것이 이어져 김 의원을 관아에 붙잡아 머무르게 하였지만 또한 겨울을 나고 봄을 보내기는 어려우니, 그 때문에 지금에서야 돌아가기를 허락하여 그 가는 편에 대략 이렇게 편지를 쓴다고 하였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 편지와 같이 피봉이 없는 경우는 내지에 사연을 쓰고 다 접은 다음 그 접은 곳이 바로 보통의 피봉과 동일하게 중간을 기점으로 좌우에 수급자와 발급자에 대한 사항을 쓰고 아래 봉합처에 해당하는 곳에 착명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