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6년 4월 26일, 김기명이 역병으로 집안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상황을 알리기 위해 김낙행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46년(영조 22) 4월 26일에 息窩 金起溟이 九思堂 金樂行(1708-1766)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기명은 자가 鵬擧 혹은 天游이며, 본관은 順天이다. 그는 바로 秋潭 金如萬의 손자인데, 김여만은 김낙행의 조부인 金泰重의 장인이다. 따라서 김기명과 김성탁은 서로 고종지간이 된다. 이에 더하여 김기명은 錦翁 金學培의 손자인 金翼濂의 장인이기도 하다.
먼저 김기명은 김낙행이 薪智島에서 1월 7일에 보낸 편지를 2월 열흘쯤에 받았다고 하였다. 그때 놀랐던 심사는 지금 追說할 수 없지만 금방 유배령이 내렸다는 기별을 곧 받고서 天恩에 감축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확실한 소식이 없었고 이어 자신이 喪事로 골몰되어 있었다고 했다. 또 川前의 소식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비록 겨를이 없는 와중에 있었더라도 매우 답답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어제 들른 김낙행의 노비가, 김낙행의 어머니가 時疾을 심각하게 앓고 아직 쾌차하지 못했고 김낙행의 仲父가 次婦를 잃었다는 소식을 전했다고 하면서 이것이 사실이냐고 묻고, 매우 경악하였다고 했다. 김기명은 金起浩가 2월 27일에 역병이 도는 곳에서 병을 얻었는데 그 증상이 마마와 같았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해 마마를 치료하였으나 12일에 끝내 숨졌으므로, 형제를 잃은 애통함이 크다고 했다. 더구나 大斂하는 날에 喪人이 앓기 시작하고 다음날에 그 며느리가 자리에 누웠으며 素와 檠 두 조카 집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전염되었다고 하였다. 또 22일에는 㦿도 감염되었는데 열이 떨어진 후에 자신이 獨孫을 데리고 비접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윤달 6일에 아이의 병이 악화되고 며느리도 병을 앓게 되었다고 했다. 김기명은 거의 다한 목숨으로 극렬한 우환을 홀로 맞닥뜨리고 있으니 넋을 잃고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행히 어제 부자가 상면하였기에 매우 다행하였다고 했다. 김기명은 김낙행이 집을 언제 떠났고 김성탁의 기거가 근래 어떠한지 안부를 물었다. 끝으로 김낙행 일가의 喪事가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다고 했는데, 柳令公이 지방관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客館에서 죽었으니 매우 애통하다고 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