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2년 4월 25일, 권정택이 김세용의 상사 및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김낙행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42년(영조 18) 4월 25일에 小山 權正宅(1706-1765)이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九思堂 金樂行(1708-1766)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정택은 蒼雪齋 權斗經의 손자이자, 琅玕軒 권모의 아들이다. 권두경이 瓢隱 金是榲의 사위이므로, 권정택은 김시온의 외증손이고, 권정택과 김시온의 증손인 제산 김성탁(김낙행의 부친)은 서로 재종지간이 된다.
권정택은 伊湖 金世鏞(1673-1742)의 喪事가 유림의 運氣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매우 애통한 상황에서, 汾浦와 龜首에서 연이어 불행한 일이 생긴 것에 대하여 더욱 참담하다고 하였다. 권정택 자신은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고 했는데, 다만 동생이 瘟疫에 걸려서 일전에는 목숨이 위태로웠다고 했다. 다행히 약에 힘입어서 겨우 차도를 보았으나 餘症이 아직 좋지 않다고 하였다. 또 권정택의 부친이 釣堤의 別業으로 들어간 지 이미 수십 일이 되었는데, 이곳에는 염병의 기운이 없고, 집안의 우환과 서로 떨어져서 지내므로 다행하다고 하였다. 訥翁 李光庭이 염병을 피해 거의 달포 동안 石泉에 우거했었는데 堂叔도 가서 『荷塘集』을 對校하고 序文도 완성하였다고 했다. 또 마침 溪村에 우거하고 있는 鶴陰 金景泌도 왕래하면서 간간히 詩를 수창하니, 곧 산중의 勝事가 되었다고 했다. 이어 눌옹 이광정이 권정택 집안의 齋舍로 옮겨 살고 있다는 등의 소식도 전하였다. 추신에서는, 伊湖로 보내는 자신의 慰狀을 바로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90도를 기준으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며 내용을 기록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