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1년 9월 1일, 김성탁이 부친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른 상대를 위로하기 위해 보낸 위문편지
내용 및 특징
1741년(영조 17) 9월 1일에 霽山 金聖鐸(1684-1747)이 보낸 위문편지이다. 김성탁은 제주도에서 육지인 광양으로 이배되어 있던 중 모친상을 당하게 되었는데, 당시 좌의정宋寅明의 요청으로 말미를 얻어 돌아와서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이 편지는 그 직후에 작성된 것이다. 이 편지는 김성탁이 상대에게 보낸 慰狀과 이에 점련된 또 하나의 위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취인은 동일인으로 보인다.
먼저 위장은 김성탁이 부친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른 상대를 위로하기 위해 보낸 것이다. 상대는 건강이 좋지 못하여 늘 조섭 중에 있었는데 지나치게 슬퍼한다면 효자가 몸을 온전히 하는 도리가 아닐 것 같다고 하면서 자애하기를 당부하였다. 그런데 柳正字의 편지를 통해서 상대가 평안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근심스러운 마음을 가눌 수 없다고 하면서, 억지로라도 죽을 드시라고 하였다. 김성탁 자신은 모친의 장사를 치르고 곧장 配所로 돌아갔기 때문에 아주 가까운 곳이면서도 직접 나아가 위문하지 못하였고, 도착해서는 인편이 오랫동안 막혀서 위장도 뒤늦어졌다고 하면서, 평소 情誼에 비추어 잘못이 크다고 하였다.
점련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다. 쇠약한 나이에 병을 무릅쓰고 잠자리를 함께 하며 단란하게 지냈던 즐거움은 근래 있지 않았던 다행스런 일이었다고 했다. 더구나 서늘한 가을에 浮石寺에서 노닐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열흘도 못되어 갑자기 각자 멀리 떨어지게 되었으니 노년의 인사가 어찌 이리도 기약할 수 없느냐고 하였다. 또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지도 못했는데 凶報가 갑자기 이르니 매우 애통하다고 하였다. 3월 이후 風痺가 다시 발작하여 거동에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서 소식을 얻지 못하여 장삿날을 언제 잡았는지도 몰랐는데, 企仲이 들른 것으로 인하여 이미 장사를 치렀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였다. 또한 기중이 상대가 너무나 건강을 상하고 두 번이나 피를 쏟았다고 말하였으므로, 더욱 심하게 걱정되었다고 하였다. 疏食이라도 들어서 보중하기를 신신당부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