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5년 8월 8일, 김광국이 상대의 소장에 대한 비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자신의 파재 후 만나기를 바라는 등의 내용으로 김성탁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35년(영조 11) 8월 8일에 六忍齋 金光國(1682-1755)이 霽山 金聖鐸(1684-1747)에게 보낸 편지이다. 발급인 김광국은 자가 士能, 본관이 光山으로, 金榏의 아들이다. 그는 증광 진사시에 입격한 바 있고, 訥隱 李光庭, 江左 權萬과 깊이 교유하였다. 葛庵李玄逸을 신원하기 위한 상소 운동에 疏首로서 참여하기도 하였다. 저서에 문집이 있다.
먼저 김광국은 전날 이별한 일은 지금까지도 서운한 마음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어 김성탁이 도착한 후에 어버이의 壽宴을 열어 경사를 더하였으니, 자신은 우러러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김성탁의 疏章에 대한 임금의 批答이 이제 막 내렸지만 체직을 허락받지는 못했으니, 김성탁이 그 거취를 어찌 결정하겠느냐고 하였다. 김광국은 자신이 어제 書院에 도착하여 바야흐로 入齋할 것인데, 장차 罷齋한 후에는 近地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파재하는 저녁에 김성탁이 왕림하여 달빛 비치는 강물에 배를 띄운다면 하나의 勝事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올 때에 汝修(雨溪 金命錫) 노형을 데리고 함께 온다면 故人의 정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善伯도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을 봄에 하였으니 그가 그 약속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하였다. 大收 형이 이미 낸 回文에도 부탁한 바가 있을 것이리라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김낙행은 入齋할 의사가 없는지 물었는데 이는 자신이 그를 매우 만나고 싶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 편지와 같이 피봉이 없는 경우는 내지에 사연을 쓰고 다 접은 다음 그 접은 곳이 바로 보통의 피봉과 동일하게 중간을 기점으로 좌우에 수급자와 발급자에 대한 사항을 쓰고 아래 봉합처에 해당하는 곳에 서압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90도를 기준으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며 내용을 기록했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을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간찰에서는 8번에 걸쳐 줄을 바꾸거나 극행을 올리고 대두를 사용하여 존경을 표현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