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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3년 박용상(朴龍相)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3+KSM-XF.1733.4777-20110630.00902570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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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박용상, 김성탁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작성시기 1733
형태사항 크기: 36.6 X 39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천전 의성김씨 제산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33년 박용상(朴龍相) 서간(書簡)
1733년 6월 26일, 박용상이 죽은 아들의 뇌문을 부탁하기 위해 김성탁에게 보낸 편지이다. 박용상은 요절한 아들이 타향에서 객사한데다가 정이나 예나 흡족하게 하지 못하여 매우 슬픈 마음을 토로하였다. 이어서 상대의 위문편지에 감사의 마음도 표했다. 그는 아들이 고생하며 자랐음에도 크게 성취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었다고 하며 상대에게 이 아이를 위해 애도하는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김동현

상세정보

1733년 6월 26일, 박용상이 죽은 아들의 뇌문을 부탁하기 위해 김성탁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33년(영조 9) 6월 26일에 畸軒 朴龍相(1680-1738)이 죽은 아들의 誄文을 부탁하기 위해 霽山 金聖鐸(1684-1747)에게 보낸 편지이다. 박용상은 자가 見卿, 본관이 務安으로, 寧海 출신의 학자이다. 그는 수취인인 제산 김성탁, 江左 權萬과 깊이 교유하였는데, 특히 1721년(경종 1)에는 이들과 함께 伏閤하여 葛庵 李玄逸을 신원하고자 하였다. 김성탁은 「朴見卿哀辭」를 지어 그의 인품과 문장 실력, 학문적 열성 등을 기술하기도 하였다.
박용상은 자신의 아들이 갑자기 요절하여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겠다고 했다. 더구나 아들이 타향에서 객사한 관계로, 위독할 때에 구호하지 못했고 수습하는 절차도 情禮에 흡족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이어 김성탁이 간절한 사연이 담긴 위문편지를 보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도 표했다. 그는 흉년을 맞아 返葬하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으므로 心腑를 졸였다고 하였다. 자신의 아들이 태어난 지 7일 만에 그 어미를 잃고 온갖 고생 끝에 장성한 사실은 김성탁도 잘 아는 바라고 했다. 또 근래 아들이 자못 태도를 고쳐먹고 공부하였는데, 文學의 경우에도 성취할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마음속으로 기대를 가졌던 것은 오직 이 아이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용상은 간략하게나마 誄文을 지어 죽은 아이의 원통한 마음을 위로해 주기를 김성탁에게 부탁하였다. 자신의 아들이 생전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다섯 살 때에 죽었고, 죽기 3일 전에 사내아이를 또 낳았으나 겨우 스무날이 지나서 죽고 말았으니, 이것이 죄 많은 자신 탓인 것 같아서 원통하다고도 했다. 추신에서는 東厓 李浹이 하나 뿐인 손자를 잃었으므로 놀랍고 참담하기 그지없다고 했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 편지와 같이 피봉이 없는 경우는 내지에 사연을 쓰고 다 접은 다음 그 접은 곳이 바로 보통의 피봉과 동일하게 중간을 기점으로 좌우에 수급자와 발급자에 대한 사항을 쓰고 아래 봉합처에 해당하는 곳에 ‘省式謹封’을 적었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90도를 기준으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며 내용을 기록했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을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간찰에서는 4번에 걸쳐 줄을 바꿔서 극행으로 올려 존경을 표현했다.
喪禮는 죽음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四禮가운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서간문 가운데 위장은 일반 서간에 비해 특별한 서식을 갖추고 있다. 즉 일반 서간에 비해 글씨를 작게 쓰고 초서가 아닌 정서를 쓰며 지면의 상단을 확연하게 띄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어 역시 특별하게 사용하는데, 서신을 나타내는 용어로 書나 札 등의 용어를 쓰지 않고 疏를 쓴다. 또 수취인이 喪人일 경우 哀座下 ․ 哀座前 ․ 哀座 ․ 哀次 등의 용어를,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을 孝廬 ․ 廬所 ․ 廬下 ․ 廬次 ․ 廬史라고 칭한다. 그리고 服人일 경우는 服座下 ․ 服座前 ․ 服座 ․ 服案 ․ 服史 등의 용어를 쓴다. 이는 모두 『禮記』와 『孝經』 등에 근거하여 ‘哀’자와 ‘服’자를 쓰는 것이다. 이외에도 발급인은 스스로를 罪人이라고 표현하고, 문두에 稽顙 ․ 稽顙再拜 ․ 頓首 ․ 頓首再拜 ․ 省禮 ․ 省式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 용어들 역시 발급인 또는 수취인의 당시 상황이나 위계관계 등에 따라 구분하여 쓴다. 이 편지는 아들 상을 당한 아버지의 편지로서 위장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즉 글씨를 작게 하여 여백을 많이 둔다거나 피봉에 ‘省式謹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등이 그것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김동현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33년 박용상(朴龍相) 서간(書簡)

金參奉 座前
答狀上
龍相 餘殃未殄 延及無辜 奄見小子 遽爾夭折
悲念傷割 不自勝堪 加以客殞他鄕 疾痛生死之
際 旣不得相捄相守 含斂棺肂之節 又不得如情如
禮 節節痛恨 若受鋒刃 寃呼狂叫 如欲無生 而
猶且而言而食 坐遣時月 誰謂木石頑哉 伏蒙
尊慈俯賜
慰問 反復寬譬 辭旨勤摯 哀感之至 不覺涕
泗之交下也 卽日旱炎甚酷 不審
省侍下體履何如 承以隣比癘氣 未免柝眷搬移
之撓 未知終無切近之憂 而已得團集否 件件馳傃不
龍相 老人精力 當此極熱 益覺綿憐 身家亦自
遭慘以來 種種善病 令人䕥然無生意 而惟是返葬
一款 又非凶歲薄力 所可容易辦得者 以此心腑煼
煎靡定 雖欲勉追先達 以答朋舊之望 而何可得
哉 竊有私懇 玆附布之 是子生孩七日 便失其毋 辛勤
鞠養 以至成長 此則
兄之所知 而近來以來 渠頗折節斂氣 非復昔日模
樣 至於文學 亦有長進之望 雖不曾向渠向人開口
稱許 而心所覬幸於他日者 惟在是子矣 今皆已矣 哀何
可忘 伏望兄 哀其死而愍其生 略敍爲一言之誄 以
慰土中之寃 如何如何 曾有一男一女 俱五歲 而失死之前
三日 又擧一丈夫子 甫過二旬而不育 此莫非龍相積惡
使渠 終不得有後而死也 寃哉痛哉 挽紙 時未措得
從當送呈耳 病暑昏到 急聞有便 撥忙胡草 並
冀恕諒 伏惟
下照 □狀上
癸丑六月卄六日 朞服弟 朴龍相 狀上

東厓失其獨孫 爲生爲死 驚慘無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