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1년 5월 15일, 박용상이 혹심한 가뭄 상황을 알리고 학술 논쟁을 벌인 일 등을 알리기 위해 김성탁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31년(영조 7) 5월 15일에 畸軒 朴龍相(1680-1738)이 霽山 金聖鐸(1684-1747)에게 보낸 편지이다. 박용상은 자가 見卿, 본관이 務安으로, 寧海 출신의 학자이다. 그는 수취인인 제산 김성탁, 江左 權萬과 깊이 교유하였는데, 특히 1721년(경종 1)에는 이들과 함께 伏閤하여 葛庵 李玄逸을 신원하고자 하였다. 김성탁은 「朴見卿哀辭」를 지어 그의 인품과 문장 실력, 학문적 열성 등을 기술하였다.
박용상은 松沙 權斗緯가 온 것으로 인하여 답장을 받고, 그때 김성탁이 寓所를 정리하고 되돌아가 잘 지낸다는 것을 알고서 매우 기뻤다고 하였다. 이어서 다시 김성탁의 안부와 그 부인의 차도를 물었다. 또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던 痘患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물었다. 박용상은 자신이 우거하던 곳에 전염병 조짐이 있어 노친께서 일전에 本村으로 되돌아갔고 자신도 독감과 함께 설사병을 앓아서 신음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는 사이 錦陽의 祥事가 임박하니 비감을 가눌 수 없는데, 마땅히 가봐야 하지만 아팠을 뿐만 아니라 말[馬]도 없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어 혹심한 가뭄 피해에 대해 언급하면서 김성탁 쪽의 상황도 물었다. 박용상은 程子를 친히 뵙고 당초 내세운 학설의 본의를 질의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는데, 어떤 이와 학술적 논쟁을 벌였고 여기에 김성탁이 그의 의견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權萬이 보낸 詩藁 1통에 대해서 김성탁에게 비평을 부탁하였고 그 한 본을 보내고 싶지만 세밀하게 쓰기가 어려워서 후편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또 자신의 詩作 실력은 마치 嫫母가 西施의 곁에 서 있는 것 같이 형편이 없으나 권만이 자신에게 부쳐준 시에 대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부끄럽게도 번번이 차운하여 보내고 있다고 하면서 김성탁도 한 번 보고 비평해 달라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從妹 내외의 안부 등을 물었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 사대부들의 일상에서 학술논쟁을 벌이거나 시를 주고받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 편지와 같이 피봉이 없는 경우는 내지에 사연을 쓰고 다 접은 다음 그 접은 곳이 바로 보통의 피봉과 동일하게 중간을 기점으로 좌우에 수급자와 발급자에 대한 사항을 쓰고 아래 봉합처에 해당하는 곳에 서압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90도를 기준으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며 내용을 기록했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을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간찰에서는 약 8번에 걸쳐 줄을 바꾸거나 극행으로 올리거나 대두를 사용하여 존경을 표현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