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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년 박용상(朴龍相)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3+KSM-XF.1731.4777-20110630.009025700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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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박용상, 김성탁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작성시기 1731
형태사항 크기: 33.3 X 48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천전 의성김씨 제산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31년 박용상(朴龍相) 서간(書簡)
1731년 5월 15일, 박용상이 혹심한 가뭄 상황을 알리고 학술 논쟁을 벌인 일 등을 알리기 위해 김성탁에게 보낸 편지이다. 박용상은 상대의 답장을 받고 잘 지낸다는 것을 알고서 매우 기뻤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상대의 안부와 그 부인의 차도 및 인근의 마마병에 관하여 물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사는 곳에 전염병 조짐이 생긴 일, 금양의 상사에 참석하지 못한 상황을 전했다. 어떤 이와 학술적 논쟁을 벌인 일, 권만이 부쳐준 시에 대하여 차운하여 보내고 있던 상황 등을 알리며 상대에게도 비평해 주기를 청했다.
김동현

상세정보

1731년 5월 15일, 박용상이 혹심한 가뭄 상황을 알리고 학술 논쟁을 벌인 일 등을 알리기 위해 김성탁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31년(영조 7) 5월 15일에 畸軒 朴龍相(1680-1738)이 霽山 金聖鐸(1684-1747)에게 보낸 편지이다. 박용상은 자가 見卿, 본관이 務安으로, 寧海 출신의 학자이다. 그는 수취인인 제산 김성탁, 江左 權萬과 깊이 교유하였는데, 특히 1721년(경종 1)에는 이들과 함께 伏閤하여 葛庵 李玄逸을 신원하고자 하였다. 김성탁은 「朴見卿哀辭」를 지어 그의 인품과 문장 실력, 학문적 열성 등을 기술하였다.
박용상은 松沙 權斗緯가 온 것으로 인하여 답장을 받고, 그때 김성탁이 寓所를 정리하고 되돌아가 잘 지낸다는 것을 알고서 매우 기뻤다고 하였다. 이어서 다시 김성탁의 안부와 그 부인의 차도를 물었다. 또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던 痘患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물었다. 박용상은 자신이 우거하던 곳에 전염병 조짐이 있어 노친께서 일전에 本村으로 되돌아갔고 자신도 독감과 함께 설사병을 앓아서 신음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는 사이 錦陽의 祥事가 임박하니 비감을 가눌 수 없는데, 마땅히 가봐야 하지만 아팠을 뿐만 아니라 말[馬]도 없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어 혹심한 가뭄 피해에 대해 언급하면서 김성탁 쪽의 상황도 물었다. 박용상程子를 친히 뵙고 당초 내세운 학설의 본의를 질의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는데, 어떤 이와 학술적 논쟁을 벌였고 여기에 김성탁이 그의 의견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權萬이 보낸 詩藁 1통에 대해서 김성탁에게 비평을 부탁하였고 그 한 본을 보내고 싶지만 세밀하게 쓰기가 어려워서 후편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또 자신의 詩作 실력은 마치 嫫母西施의 곁에 서 있는 것 같이 형편이 없으나 권만이 자신에게 부쳐준 시에 대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부끄럽게도 번번이 차운하여 보내고 있다고 하면서 김성탁도 한 번 보고 비평해 달라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從妹 내외의 안부 등을 물었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 사대부들의 일상에서 학술논쟁을 벌이거나 시를 주고받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 편지와 같이 피봉이 없는 경우는 내지에 사연을 쓰고 다 접은 다음 그 접은 곳이 바로 보통의 피봉과 동일하게 중간을 기점으로 좌우에 수급자와 발급자에 대한 사항을 쓰고 아래 봉합처에 해당하는 곳에 서압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90도를 기준으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며 내용을 기록했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을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간찰에서는 약 8번에 걸쳐 줄을 바꾸거나 극행으로 올리거나 대두를 사용하여 존경을 표현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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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731년 박용상(朴龍相) 서간(書簡)

金參奉 服史
振伯兄 謹拜狀上[署押]
仲章來 伏承
辱覆 欣審其時 撤寓還奠
侍省起居有相 感慰沒量 向後有日 更不審旱天
兄服履佳勝 閤憂加減 亦如何 近地發痘 甚可遠慮 未知
熾熄何居 種種貢慮之至 弟 鄙寓亦有可疑之端 老慈
日前 還向本村 弟亦重患毒感 兼以暴泄 疲薾呻吟 可
悶可苦 轉頭之頃 錦陽祥事遽迫 不勝悲感 情禮固當
往見 而疾病冗擾 且乏騎率 不得遂意 只自悲愧而已 此
地旱暵孔酷 兩麥皆枯 種不入土 古老皆云 昔年景象
完然復回 極可寒心 未知貴地 能免如是之慘耶
示諭事 當初所執 不爲不固矣 今兄 乃借重於不敢容
喙之地 束手送款之外 更何措說 中無先生集 不得覆
視 然錦注 旣以此爲問 則其疑似難判 自古已然 兩存之
亦何妨 只恨不得親見 程子以質當初立言之本意也 好笑
一甫其後 更得書否 所答云何 渠之遠借聲援 非欲助我言
欲抗兄爲效 故多費辭說 此正好勝之氣 作祟耳 今答
渠書 無便可附 一並投往 從彼因便如數 幸傳致如何
不膠以送 托見後封去好矣 渠送詩藁一通 其高處
可謂遍古 然弟於詩 見解不明 是知兄亦爲弟病之 而
自矜其眼目之長 以兄觀之 未知其以爲如何也 切欲寫送
一本 而難於細書 未果 當俟後便耳 立嫫母西子之傍 則
益覺形穢 而黙無一言 殊非投示之意 故輒和其韻
送去 凡鄙可愧 兄亦一爲過眼 回示評批如何 唐城棘人家 亦姑免
他撓云矣 行彦□弟病 尙未奉接 聞其歷遍境內 而姑無草占處
昨昨 聞踰盈境矣 未知其後所報也 餘萬 忙擾不宣 伏惟
兄下照 謹拜狀上
辛亥五月十五日 病弟 龍相

從妹內外 連得佳安耶 元丘本家 俱姑免撓 而奴僕 間染
痛者 尙未止息 觀今念後 則可以安心矣 此意使之聞之 亦望
淸之兄 意外喪耦 驚▣(怛)
何言 老親下 幼稚滿▣(室)
爲之愍慘 合有慰狀 乏
紙未果 當俟後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