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1년 12월 9일, 박용상이 자신의 근황과 주변 인물들의 상사를 알리기 위해 김성탁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31년(영조 7) 12월 9일에 畸軒 朴龍相(1680-1738)이 霽山 金聖鐸(1684-1747)에게 보낸 편지이다. 박용상은 자가 見卿, 본관이 務安으로, 寧海 출신의 학자이다. 그는 수취인인 제산 김성탁, 江左 權萬과 깊이 교유하였는데, 특히 1721년(경종 1)에는 이들과 함께 伏閤하여 葛庵 李玄逸을 신원하고자 하였다. 김성탁은 「朴見卿哀辭」를 지어 그의 인품과 문장 실력, 학문적 열성 등을 기술하였다.
박용상은 추운 계절을 만나 病骨이 부러질 것 같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출입해야 할 경우에는 번번이 고통으로 신음한다고 하였다. 자신의 병세가 이와 같아서 고개를 넘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김성탁도 畏忌로 인하여 두문불출하고 있으니 이후 상봉을 기약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했다. 이에 달포 전의 만남이 더욱 다행하게 여겨진다고 하였다. 박용상은 김성탁이 편지에서 마음이 서로 통하기만 한다면 수백 리 雲山이 가로놓여 있어도 같은 집에 함께 앉아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한 것에 대해서, 탄복의 뜻을 표하고 그 지극한 뜻을 명심하겠노라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여러 喪事에 대해서 아쉬운 마음을 표하였다. 종손인 朴上舍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一家의 의리로 가지는 슬픔 그 이상이라고 하였고, 栗里의 洪兄도 뜻밖에 죽고 말았으므로 슬픈 마음을 가눌 수 없다고 하였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 편지와 같이 피봉이 없는 경우는 내지에 사연을 쓰고 다 접은 다음 그 접은 곳이 바로 보통의 피봉과 동일하게 중간을 기점으로 좌우에 수급자와 발급자에 대한 사항을 쓰고 아래 봉합처에 해당하는 곳에 서압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90도를 기준으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며 내용을 기록했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을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간찰에서는 4번에 걸쳐 줄을 바꿔서 존경을 표현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