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1년 4월 23일, 박용상이 안부를 묻고 권만의 편지를 받은 것 등을 알리기 위해 김성탁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31년(영조 7) 4월 23일에 畸軒 朴龍相(1680-1738)이 霽山 金聖鐸(1708-1766)에게 보낸 편지이다. 박용상은 자가 見卿, 본관이 務安으로, 寧海 출신의 학자이다. 그는 수취인인 제산 김성탁, 江左 權萬과 깊이 교유하였는데, 특히 1721년(경종 1)에는 이들과 함께 伏閤하여 葛庵 李玄逸을 신원하고자 하였다. 김성탁은 「朴見卿哀辭」를 지어 그의 인품과 문장 실력, 학문적 열성 등을 기술하였다.
박용상은 일전에 一甫의 편지를 받았고, 여기에는 詩藁와 雜說까지 곁들여졌는데, 그 글들이 찬란하게 문채를 이루었기 때문에 참으로 좋았다고 했다. 옛사람이 이른바 "奇才로다! 기재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리라고 했다. 또 그간에 마땅히 서로 알릴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우선 겨를이 없기에, 後便을 기다려야 하겠다고 했다. 김성탁의 동생인 振叔형과 바쁘게 작별하였기 때문에 마음에 잊히지 않는다고 하면서 근간에 김성탁과 서로 만났을 것이리라고 했다. 善伯 내외는 모두 평안한지 물었고 從妹夫 집안도 잘 지내고 있는지 물었다. 바빠서 편지를 쓰지 못하고 또 그 字를 잊어 버렸으므로 자신의 昏耗함이 한탄스럽다고 했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 편지와 같이 피봉이 없는 경우는 내지에 사연을 쓰고 다 접은 다음 그 접은 곳이 바로 보통의 피봉과 동일하게 중간을 기점으로 좌우에 수급자와 발급자에 대한 사항을 쓰고 아래 봉합처에 해당하는 곳에 ‘省式謹封’을 적었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내용이 길지 않기 때문에 회전형식에 이르지는 않았다. 또한 위장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내용은 그러하지 않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으로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간찰에서는 ‘伏惟’와 ‘太碩人’의 사이, ‘伏惟’와 ‘兄親愛之至’의 사이 등에 행을 바꾸고 극행으로 올려 적어 주체가 상대임을 밝힘과 동시에 존대의 의미도 나타내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