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1년 8월 24일, 김성탁이 이번 작황에 재해를 입은 이야기와 닭실 종숙의 안부를 묻는 등의 내용으로 사돈인 권설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31년(영조 7) 8월 24일에 霽山 金聖鐸(1684-1747)이 사돈인 權薛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성탁은 南人 명문가 출신으로 당시 영남에서 추중을 받던 학자이자 관료였다. 그는 適庵 金台重, 갈암 이현일, 密庵 李栽의 문인인데, 특히 名義罪人의 오명을 쓴 그의 스승 이현일을 신구하려다가 濟州旌義縣에 위리안치를 당한 바 있다. 그의 첫째아들인 九思堂 金樂行이 수취인 권설의 딸인 安東權氏와 혼인하였다.
김성탁은 노친의 感冒가 오랫동안 낫지 않고 마누라도 좋아지지 않고 있기에 매우 염려스럽다고 하였다. 또한 어린아이의 醮禮는 이미 약조한 후에 바꾸기가 어려워서 장차 내달 열흘에 治送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매우 군색하니 매우 창피스럽다고 하였다. 작황은 장맛비가 내린 후에 저쪽에서는 또 災損을 입었다고 들었다고 하면서 사실이냐고 물었다. 김성탁은 가뭄 끝에 간신히 남은 것이 다만 晩粟이었는데 이마저도 이삭을 먹는 벌레가 들판에 가득하여 충해가 매우 혹심하다고 하였다. 지금 이후의 상황은 진짜로 지난 신해년의 상황과 같을 것이라고 하면서 하늘이 하는 일이니 뭐라 하겠느냐고 하였다. 닭실 종숙께서는 연이어 평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一甫가 골짜기를 나왔다고 들었다고 하면서 지금 그가 沙洞에 머물고 있는지 물었다. 새로 寓居한 樂土가 인간 세상과 비할 때 어떠하다고 말하였는지도 물었다. 김성탁은 향중의 풍랑이 이미 크게 놀라운데 宣城(禮安)의 일이 또 일어났으므로 한탄스럽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歸覲했던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 문제 등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 편지와 같이 피봉이 없는 경우는 내지에 사연을 쓰고 다 접은 다음 그 접은 곳이 바로 보통의 피봉과 동일하게 중간을 기점으로 좌우에 수급자와 발급자에 대한 사항을 쓰고 아래 봉합처에 해당하는 곳에 착명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일반적인 편지 양식에 따랐으며 추록은 우측 여백에 기록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