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9년 2월 26일, 김성탁이 안핵사의 선유 때문에 28일 열릴 도회에 참석 의사를 알리고자 이생원 등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29년(영조 5) 2월 26일에 霽山 金聖鐸(1684-1747)이 李生員 등에게 보낸 편지이다. 수취인은 이생원과 柳生員인데, 편지 내용상 김성탁이 원장을 맡고 있는 서원에서 副任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김성탁은 서원 심부름꾼을 통해서 欽兄이 서원에 온 것을 알게 됐다고 하면서, 자신이 비록 만나지 못했어도 벌써 본 것과 같아 매우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또 봄추위에 연이어 건승하다고 하므로 더욱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明兄이 海邑에서 돌아온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기거가 평안하다고 하므로 기뻤으나, 우환으로 분주하니 염려스럽다고 하였다. 范庵 金翼溟이 첫아이로 사내아이를 얻었다고 하면서, 피차가 다행한 일이라고 하였다. 김성탁은 자신이 맡은 主席의 자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더구나 수취인들을 부임으로 두고 있으니 더욱 편치 못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세를 볼 때 경솔히 사임하기 어려우므로, 직분에 따라 힘써 보겠노라고 하였다. 김성탁은 상대방들에게 按覈使의 통문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안핵사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영남을 宣諭하려는데, 안동 사림의 都會로 인해 이달 28에 도착하여 유생들로 하여금 향교에 모이게 하여 임금의 뜻을 전달할 것이라고 하였다. 의리를 볼 때 나아가지 않을 수 없으므로, 김성탁은 28일에 내려가려 한다고 했다. 두 사람도 오리라 여겨진다고 하면서 볼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葛庵 이현일을 신원하는 일은 실로 유림으로서는 그만 둘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재차 상소하였으나 임금에게 보고되지 못하였고 기회가 맞지 않아 아직 다시 거사하지 못하였으므로 답답하다고 하였다. 김성탁은 안핵사가 선유하고 나서 여론을 탐청하게 되면 곧 좋은 기회일 것이라고 하였다. 약간의 동지가 연명으로 글을 올려 전말을 진술하고, 다시 복명하는 날에 안핵사가 임금에게 보고한다면 輿情이 상달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상대방들의 의향을 물었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 편지와 같이 피봉이 없는 경우는 내지에 사연을 쓰고 다 접은 다음 그 접은 곳이 바로 보통의 피봉과 동일하게 중간을 기점으로 좌우에 수급자와 발급자에 대한 사항을 쓰고 아래 봉합처에 해당하는 곳에 착명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90도를 기준으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며 내용을 기록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