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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7년 이태환(李台煥)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3+KSM-XF.1727.4777-20110630.00902570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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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태환, 김성탁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작성시기 1727
형태사항 크기: 34 X 46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천전 의성김씨 제산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27년 이태환(李台煥) 서간(書簡)
1727년 6월 12일, 이태환이 상대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요즘 상황을 알리고자 김성탁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태환은 상대의 마을에 마마병이 없어졌다는 소식에 기뻐했으나 상대의 막내 동생인 김명탁의 3년 상을 마친 것에 대해 위로했다. 자신은 옥산 재종형이 객지에서 죽었고 단계 재종형이 모함에 걸려들어 장차 닥칠 화를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라고 했다. 그는 상대에게 나라가 어지러워 차라리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선비의 본분에 맞게 독서에 전념하라고 했다. 자신은 몇 칸의 집을 짓는 일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여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김동현

상세정보

1727년 6월 12일, 이태환이 상대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자 김성탁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27년(영조 3) 6월 12일에 惺軒 李台煥(1697-1774)이 霽山 金聖鐸(1684-1747)에게 보낸 편지이다. 발급인 이태환은 자가 公燮, 본관이 載寧으로, 石溪 李時明의 후손이다.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안동부사에 의해 도훈장으로 초빙되기도 할 만큼 정주학에 조예가 깊었다. 김성탁 및 그의 아들 김낙행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金敏行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태환김성탁의 안부를 묻고, 元里에 痘患이 없어져서 板輿를 받들어 다시 모신 지 여러 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기쁜 마음을 표하였다. 다만 김성탁의 막내 동생인 岳湖 金命鐸(1698-1726)의 大祥이 지나갔으므로, 김성탁이 스스로 감회에 젖어 그 어머니의 비애를 위로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이태환은 집안의 화가 그치지 않아서, 여러 형제들 가운데 학문에 뜻을 두어 집안의 기대를 받았던 玉山 재종형이 필경 객지에서 목숨이 다하게 되었으므로 매우 슬프다고 하였다. 또한 丹溪 재종형이 행동을 신중하게 하지 못하여 남의 모함에 걸려들었고 訟官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여, 장차 닥칠 화를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라고 했다. 이태환김성탁의 어머니가 무탈하게 계시므로 김성탁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과거 공부에 전념하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政局이 예전보다 못한 상황이므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선비의 본분에 맞게 독서에 전념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했다. 이태환 자신은 삼십 년 동안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정처 없이 지내다가 師友와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자 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몇 칸의 모옥을 짓는 일이 잘 진척되지 못하는 형편이라서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金正鐸의 아들 金道行에게는 따로 편지를 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 편지와 같이 피봉이 없는 경우는 내지에 사연을 쓰고 다 접은 다음 그 접은 곳이 바로 보통의 피봉과 동일하게 중간을 기점으로 좌우에 수급자와 발급자에 대한 사항을 쓰고 아래 봉합처에 해당하는 곳에 서압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90도를 기준으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며 내용을 기록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27년 이태환(李台煥) 서간(書簡)

金進士 侍下史
老兄 謹拜 候狀上
奉一書道意 不翅如折枝之易 而循懶 久曠
金玉之音 又一向靳閟 逋滯自訟 亦不能無江湖之怨也
盾日敲赥 不審
侍餘學履 何似 仄聞元里痘淨 扶奉
板輿 還奠有日 深庸欣慰 但日月丸跳
季氏兄中祥奄過 伏惟
感念倍萬 尤難以奉塞
太碩人之悲矣 晴峯喪家 亦已撤筵 諸瞹然芳躅 看漸
荒古 凡有誼愛者 亦一傷心耳 台煥 家禍不□
再從兄 畢竟客土畢命 痛割之私 如何盡諭 諸
兄弟中 稍有志學 爲門戶望者 看敎盡 此已索
然 失生意 意外 灾厄又重重 丹溪再從兄 一不謹行
脚 復爲人擠陷 又値一種不佳訟官 禍將叵測 殆
不欲向人道也
禮書已讀畢 有怎別頭端工夫 爛熳書籤 無非
知格學進之資 然
太碩人無恙 黽勉在治程業 或復如前日之爲耶
時勢物態 比十數年前 又太不及 莫如早斷置此事
隨分作校書閑人 而猶依違 不卽決 似卒不免
爲中道失脚之人也 如少弟 三十不爲家 東西援止者 蓋欲築
近師友之地 而卽今數間茅椽 有作沉絮之勢 可
懼 還可閟 孰能分我華山一半者也
從人 旣無此力勢
付寄筆舌 以鼓不死之心 亦或爲一賜耶 可呵
自餘偵便 忙草
不盡宣 伏惟
尊察 餘拜狀上
丁未六月十二日 少弟 台煥 狀上

令叔氏
胤兄未別幅
下布 敢望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