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7년 6월 12일, 이태환이 상대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자 김성탁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27년(영조 3) 6월 12일에 惺軒 李台煥(1697-1774)이 霽山 金聖鐸(1684-1747)에게 보낸 편지이다. 발급인 이태환은 자가 公燮, 본관이 載寧으로, 石溪 李時明의 후손이다.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안동부사에 의해 도훈장으로 초빙되기도 할 만큼 정주학에 조예가 깊었다. 김성탁 및 그의 아들 김낙행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金敏行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태환은 김성탁의 안부를 묻고, 元里에 痘患이 없어져서 板輿를 받들어 다시 모신 지 여러 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기쁜 마음을 표하였다. 다만 김성탁의 막내 동생인 岳湖 金命鐸(1698-1726)의 大祥이 지나갔으므로, 김성탁이 스스로 감회에 젖어 그 어머니의 비애를 위로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이태환은 집안의 화가 그치지 않아서, 여러 형제들 가운데 학문에 뜻을 두어 집안의 기대를 받았던 玉山 재종형이 필경 객지에서 목숨이 다하게 되었으므로 매우 슬프다고 하였다. 또한 丹溪 재종형이 행동을 신중하게 하지 못하여 남의 모함에 걸려들었고 訟官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여, 장차 닥칠 화를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라고 했다. 이태환은 김성탁의 어머니가 무탈하게 계시므로 김성탁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과거 공부에 전념하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政局이 예전보다 못한 상황이므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선비의 본분에 맞게 독서에 전념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했다. 이태환 자신은 삼십 년 동안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정처 없이 지내다가 師友와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자 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몇 칸의 모옥을 짓는 일이 잘 진척되지 못하는 형편이라서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金正鐸의 아들 金道行에게는 따로 편지를 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 편지와 같이 피봉이 없는 경우는 내지에 사연을 쓰고 다 접은 다음 그 접은 곳이 바로 보통의 피봉과 동일하게 중간을 기점으로 좌우에 수급자와 발급자에 대한 사항을 쓰고 아래 봉합처에 해당하는 곳에 서압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90도를 기준으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며 내용을 기록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