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4년 윤4월 11일, 박용상이 권만에게 받은 시에 차운하여 그 일절을 보내기 위해 김성탁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24년(경종 4) 윤4월 11일에 畸軒 朴龍相(1680-1738)이 霽山 金聖鐸(1684-1747)에게 보낸 편지이다. 박용상은 자가 見卿, 본관이 務安으로, 寧海 출신의 학자이다. 그는 수취인인 제산 김성탁, 江左 權萬과 깊이 교유하였는데, 특히 1721년(경종 1)에는 이들과 함께 伏閤하여 葛庵 李玄逸을 신원하고자 하였다. 김성탁은 「朴見卿哀辭」를 지어 그의 인품과 문장 실력, 학문적 열성 등을 기술하였다.
박용상은 근래 정력이 쇠잔하고 치아와 머리가 빠져서 앞으로 남은 날이 얼마일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늘 온갖 근심을 떨어내고 師友 간에 나아가고 싶지만 資力이 충분치 않은 관계로 개탄스럽다고 하였다. 어저께 仁山書院 인편을 통하여 錦陽의 안부를 들었는데, 다만 그 곤란하고 다급한 상황이 사람으로 하여금 번민하게 한다고 하였다. 江左 權萬이 편지와 함께 시를 보냈는데, 그 시는 곧 권만이 葛陰 李恒培와 더불어 三溪書院에서 수창하였던 것이라고 했다. 박용상은 권만의 편지와 시가 영롱하고 奇偉하여 속세의 襟調가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곧 세상 밖의 보배라고 하였다. 박용상은 권만이 자신에게 화답하여 이항배에게 나누어 부치고 또 김성탁에게도 보내어 그곳에서부터 보내 달라고 요구하였기 때문에, 지금 운에 따라 三絶을 화답하여 그 一絶을 올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김성탁에게 화답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본 편지의 이러한 내용은 『霽山集』에 있는 「次朴見卿十二章韻」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 金命鐸이 지금 어느 곳에 머물고 있으며 계속 평안한지 안부를 물었고, 金敏行이 습기 있는 곳을 벗어나 한가로이 거처하니 그가 상쾌할 것임을 상상할 만하겠다고 했다. 金命錫과는 연락이 완전히 끊겼는데 이는 자신의 불민한 죄라고 하면서, 자신의 화답시를 그에게 보여 달라고 했다.
일상적인 내용으로 주고받았던 서간은 보통 상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상대에게 편지를 받게 된 상황 등을 이야기 하고 그것을 통해 상대의 안부를 묻거나 상대의 안부를 알게 되었다고 서두를 뗀다. 그리고 자신 또는 자신 주변 인물들의 병이나 상사 등의 일을 이야기 하며 근황을 전한 후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 편지 역시 이러한 투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일상에서 편지로 시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간찰의 사연이 짧을 경우 상하좌우의 여백이 그대로 남지만, 사연이 다 끝나지 않을 경우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 다음은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으며, 그 다음은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하여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간찰의 경우도 일반적인 간찰의 형식을 따랐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