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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김창섭(金昌燮) 호구단자(戶口單子)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3+KSM-XD.1899.4717-20110630.0015246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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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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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작성주체 김창섭, 풍산현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작성시기 1899
형태사항 크기: 46 X 43.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오미 풍산김씨 허백당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99년 김창섭(金昌燮) 호구단자(戶口單子)
김창섭이 1899년에 자신이 거주하는 곳의 관할 관청인 풍산현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당시 김창섭안동풍북면오미동 3통 8호에 살았다. 현재는 안동시풍산읍오미리이다. 보고 당시 김창섭의 가족은 모친과 처가 전부였으며, 1906년에 가서야 아들 元在를 두었다. 소유 노비는 3구였으며 기와집 10칸을 소유하고 있었다. 소유 가택에 대한 표기는 새로운 호적제도에 의한 것으로, 구형식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작성된 것이다.
최연숙

상세정보

1899년, 풍북면오미동에 사는 김창섭이 가족원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문서
[내용 및 특징]
1899년(光武 3)에 安東豊北面五美洞 3통 8호에 사는 金昌燮豊山縣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김창섭의 당시 나이는 30세이고, 본관은 豊山이며, 幼學의 신분이다. 관에서는 朱點을 찍어 확인을 했는데 김창섭 처의 四祖 위에는 주점을 찍지 않았다. 이는 1896년 호구조사규칙에 처의 사조를 기재하지 말도록 하였기 때문에 굳이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거주지 기재에 있어 조선 후기의 통호가 고정적이지 않고 식년마다 변경되었던 반면, 1896년 이후 부여된 통호번은 가옥에 부여한 고정번호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1907년 1통 3호로 바뀌기까지 김창섭의 주소는 3통 8호에서 변동이 없다. 統戶番 위에는 호구단자를 제출한 해의 干支를 써 넣었으며, 문서 왼쪽 상단에는 현감의 署押을 새긴 검은색 도장이 찍혀 있고 아래쪽에는 붉은색 ‘安東郡印’이 찍혀 있다.
김창섭의 가족으로는 모 李氏(52세), 처 柳氏(32세)가 있다. 모의 본관은 驪州, 처의 본관은 豐山인데, 본관을 뜻하는 글자로 ‘本’ 대신 ‘籍’을 쓰고 있으며, 모 앞에는 어른을 모신다는 의미의 ‘奉’자를 썼다. 김창섭秉均의 아들로 秉鈺의 양자가 되어 풍산김씨 虛白堂 金楊震 문중의 16대 종손이 되었다. 김창섭의 부는 秉鈺, 조부는 洛會, 증조부는 魯欽, 외조부는 李在徵이고, 처의 부는 芝榮, 조부는 道鳳, 증조부는 致睦이다. 처의 경우 삼대만을 기재하였지만 법적으로 기재하지 말도록 하였기 때문에 관에서는 확인하지 않았다. 처 유씨의 부는 通政大夫 行 承政院右承旨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을, 증조부는 通政大夫 司諫院大司諫 兼 知製敎를 지냈다. 四祖는 관직과 함께 외조부이면 그 본관까지 밝히고, 모와 처에 대해서도 본관을 밝히고 있어 집안의 관직 내력과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다.
1896년 9월 1일 勅令으로 호구조사규칙과 內部令으로 호구조사세칙을 공포, 시행하면서 수백여 년 동안 지속되어오던 조선시대의 호적제도가 폐지되고 새로운 호적제도가 도입되었다. 기존에는 3년에 한 번 호구단자를 작성하였으나 이후로는 매년 1월에 戶籍表와 統表를 작성하도록 하였고, 호주와 처의 四祖를 함께 기재하던 것이 호주의 사조만 기재하도록 함으로써 처의 世系 파악은 폐지되었다. 또한 호구수 외에 家宅에 관한 기재사항을 추가하여 자기 소유인지 빌린 것인지, 형태가 초가집인지 기와집인지, 몇 칸인지를 기재하도록 하였다. 이 집안의 당시 소유 노비는 3구이고, 기와집 10칸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료적 가치]
이 문서는 신호적제도가 공포된 이후 작성된 문서지만 규격화된 호적표에 작성하지 않고 기존의 방식대로 호구단자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가족원과 노비 현황을 별행으로 列書하고, 처의 사조는 아니지만 삼대를 기재하는 등 기존의 방식을 따르면서도, 10家 1統에 따른 거주지 표시나 가택에 대한 기재는 신호적제도의 방식을 따르고 있어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갑오개혁 이후 변화된 공문서 양식을 수용하기까지의 과도기적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오미리는 풍산현에 속해 있었으나 1895년 안동군 풍북면에 편입되고, 1914년 괴정리의 일부와 예천군 위라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오미리가 되었다.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행정구역이 안동시 풍산읍에 속하게 되었다.
五陵·五美는 오미리의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풍산 김씨가 이곳에 정착한 것은 김자순 때부터이다. 이때에는 마을 이름을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있다고 해서 五陵洞이라 불렀다. 그 후 김의정이 을사사화 후에 낙향하여 五畝洞으로 고쳤는데 능이란 글자가 언덕을 뜻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해서 이랑 畝자를 넣어 五畝로 고친 것이다. 그 후 김대현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가운데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이 八蓮五桂라 하여 오미동이라는 지명을 하사하게 되자 오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近代 公文書의 誕生』, 김건우, 소와당, 2008
文現妵, 韓國學中央硏究院 碩士學位論文, 2009
최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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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99년 김창섭(金昌燮) 호구단자(戶口單子)

安東豊北面五美洞己亥戶籍第三統內第八戶
幼學金昌燮年三十庚午豐山
父學生秉鈺
生父學生秉均
通德郞洛會
曾祖學生魯欽
外祖學生李在徵驪州
奉母李氏年五十二戊申驪州
柳氏年三十二戊辰豐山
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芝榮
通德郞道鳳
曾祖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知製敎致睦
外祖通訓大夫文川郡守安邊鎭管兵馬同僉節制使李博祥驪州
率婢興女年庚午奴成俊年壬戌婢占順年己卯
瓦家十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