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안동부에서 풍북면오미동에 사는 김창섭의 가족원과 소유노비 현황을 갑오년의 호구장적에 의거하여 김창섭에게 베껴 발급해 준 문서
[내용 및 특징]
1894년(高宗 31)에 安東府에서 豊北面 제 14 五美洞 2統 1戶에 사는 幼學 金昌燮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준호구는 호주의 신청에 의해 발급하므로 안동부에서 김창섭의 신청에 의해 동년에 成籍한 戶口帳籍에 의거해서 가족원과 소유노비 현황을 베껴 준 것이다. 김창섭의 당시 나이는 25세이고, 본관은 豊山이며, 幼學의 신분이다. 이 문서는 호구단자의 형식을 띤 준호구이다. 준호구는 連書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문서는 가족원과 四祖에 대해서는 別行하여 列書하였고, 소유 노비는 연서하였다.
준호구는 호구단자와 마찬가지로 1675년에 반포된 「五家作統事目」에 따라 호주의 거주지에 統과 戶를 명시한다. 오가작통이란 조선시대 다섯 집을 한 統으로 묶은 행정자치조직을 말한다. 김창섭의 가족으로는 모 李氏(47세), 처 柳氏(32세), 삼종조 洛祥(38세), 삼종형 斗燮(36세)이 있다. 모의 본관은 驪州, 처의 본관은 豐山인데, 본관을 뜻하는 글자로 ‘本’ 대신 ‘籍’을 쓰고 있으며, 모 앞에는 어른을 모신다는 의미의 ‘奉’자를 썼다. 김창섭은 秉均의 아들로 秉鈺의 양자가 되어 풍산김씨 虛白堂 金楊震 문중의 16대 종손이 되었다.
김창섭의 부는 秉鈺, 조부는 洛會, 증조부는 魯欽, 외조부는 李在徵이고, 처의 부는 芝榮, 조부는 道鳳, 증조부는 致睦이다. 처 유씨의 부는 通政大夫 行 承政院右承旨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을, 증조부는 通政大夫 司諫院大司諫 兼 知製敎를 지냈다. 四祖는 관직과 함께 외조부이면 그 본관까지 밝히고, 모와 처에 대해서도 본관을 밝히고 있어 집안의 관직 내력과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다.
호구장적에 기재된 노비 현황을 그대로 베껴준 것이기 때문에 노비 현황의 기재는 호구단자와 마찬가지로 첫머리에 “率”을 써서 그 집안 소유임을 명시하고, 각각의 노비에 대해서는 이들의 이름과 나이, 거주지만을 적어놓았다. 노비들을 연서하였는데 데리고 사는 노비 8구와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노비 1구, 도망 노비 1구를 합해 모두 10구인데, 도망 노비는 甕泉에 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준호구는 호구장적에 의거하여 관에서 베껴 주는 문서를 말하는데, 오늘날의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호주의 신청에 의해 발급되는 것이 특징이다. 준호구의 발급은 주로 소송시 또는 성적시의 첨부자료로서, 또는 노비 推刷 자료로서, 또는 役과 관련하여 신분을 증명하거나 가문과시의 자료로 필요한 경우에 이루어졌다. 『經國大典』에 준호구식이 실려 있는데, 발급일과 발급관서를 먼저 쓰고, ‘考某年成籍戶口帳內’로 시작하여 호주의 거주지와 가족원, 호주와 처의 사조 및 소유노비에 대해 連書한다. 문서 왼쪽에 안동부사의 서압이 있고, 오른쪽에 붉은색 관인이 보이며, 하단에는 수정한 글자가 없다는 周挾無改印이 비스듬히 찍혀 있다.
『풍산김씨세보』에는 김창섭이 2남 2녀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들은 金元在와 金亨在이고, 딸은 李起鎬와 李承海에게 시집갔다. 큰 아들 김원재는 1906년 9월 4일에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崔承熙, 『奎章閣』7, 서울대학교 도서관, 1983
文現妵,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