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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김낙중(金洛中) 준호구(準戶口)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3+KSM-XD.1864.4717-20110630.00152460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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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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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작성주체 김낙중, 풍산현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작성시기 1864
형태사항 크기: 50.5 X 55.8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오미 풍산김씨 허백당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64년 김낙중(金洛中) 준호구(準戶口)
1864년에 안동부에서 김낙중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준호구는 오늘날의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호주가 신청하면 발급해준다. 김낙중은 부인과 아들 세 식구가 살고 있었으며, 소유한 종은 함께 사는 7명과 외부에 살고 있는 4명, 도망한 종 1명을 포함하여 12명이다.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문서의 형식이 통합되어 간소화되는데 이 문서 역시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모습을 동시에 갖고 있다.
최연숙

상세정보

1864년, 안동부에서 풍북면오미동에 사는 김낙중의 가족원과 소유노비 현황을 갑자년의 호구장적에 의거하여 김낙중에게 베껴 발급해 준 문서
[내용 및 특징]
1864년(高宗 1)에 安東府에서 豊北面 제 14 五美洞 2統 1戶에 사는 幼學 金洛中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준호구는 호주의 신청에 의해 발급하므로 안동부에서 김낙중의 신청에 의해 동년에 成籍한 戶口帳籍에 의거해서 가족원과 소유노비 현황을 베껴 준 것이다. 김낙중의 당시 나이는 34세이고, 본관은 豊山이며, 幼學의 신분이다. 이 문서는 호구단자의 형식을 띤 준호구이다. 준호구는 連書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문서는 가족원과 四祖에 대해서는 別行하여 列書하였고, 소유 노비는 연서하였다.
준호구는 호구단자와 마찬가지로 1675년에 반포된 「五家作統事目」에 따라 호주의 거주지에 統과 戶를 명시한다. 오가작통이란 조선시대 다섯 집을 한 統으로 묶은 행정자치조직을 말한다. 김낙중의 가족으로는 처 李氏(35세), 아들 秉五(14세)가 있는데, 秉五는 1년 뒤에 사망한다. 김낙중斗欽의 아들로 魯欽의 양자가 되었다. 김낙중의 부는 魯欽, 조부는 復亨, 증조부는 宗一, 외조부는 李潤白이다. 생부인 金斗欽通訓大夫 前 行 弘文館副修撰 知製敎 兼 經筵檢討官 春秋館記事官 文臣兼宣傳官을 지냈다. 처의 부는 彙載, 조부는 林淳, 증조부는 龜紹, 외조부는 裴憲邦이다. 彙載通訓大夫 前 行 洪州牧使 兼 洪州鎭兵馬僉節制使을 지냈으며, 본관은 眞城이다. 四祖에 대해서는 관직과 함께 외조부이면 그 본관까지 밝히고, 가족원의 처와 자부에 대해서도 본관을 밝히고 있어 집안의 관직 내력과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다.
호구장적에 기재된 노비 현황을 그대로 베껴준 것이기 때문에 노비 현황의 기재는 호구단자와 마찬가지로 첫머리에 “率”을 써서 그 집안 소유임을 명시하고, 각각의 노비에 대해서는 이들의 이름과 나이, 거주지만을 적어놓았다. 노비들을 연서하였는데 데리고 사는 노비 7구와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노비 4구, 도망 노비 1구를 합해 모두 12구이다.
준호구는 호구장적에 의거하여 관에서 베껴 주는 문서를 말하는데, 오늘날의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호주의 신청에 의해 발급되는 것이 특징이다. 준호구의 발급은 주로 소송시 또는 성적시의 첨부자료로서, 또는 노비 推刷 자료로서, 또는 役과 관련하여 신분을 증명하거나 가문과시의 자료로 필요한 경우에 이루어졌다. 『經國大典』에 준호구식이 실려 있는데, 발급일과 발급관서를 먼저 쓰고, ‘考某年成籍戶口帳內’로 시작하여 호주의 거주지와 가족원, 호주와 처의 사조 및 소유노비에 대해 連書한다. 문서 왼쪽 상단에는 안동부사의 署押이 보이고 문서 중간에 수정한 글자가 없다는 周挾無改印이 비스듬히 찍혀 있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이후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문서식에 변화가 보이는데, 호구단자의 형태로 발급되는 준호구의 과도기적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김낙중斗欽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魯欽의 양자가 되어 풍산김씨 虛白堂 金楊震 문중의 14대 종손이 되었다.
五陵·五美는 오미리의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풍산 김씨가 이곳에 정착한 것은 김자순 때부터이다. 이때에는 마을 이름을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있다고 해서 五陵洞이라 불렀다. 그 후 김의정이 을사사화 후에 낙향하여 五畝洞으로 고쳤는데 능이란 글자가 언덕을 뜻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해서 이랑 畝자를 넣어 五畝로 고친 것이다. 그 후 김대현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가운데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이 八蓮五桂라 하여 오미동이라는 지명을 하사하게 되자 오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崔承熙, 『奎章閣』7, 서울대학교 도서관, 1983
문숙자, 『藏書閣』 2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文現妵,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64년 김낙중(金洛中) 준호구(準戶口)

同治三年月日安東府甲子成籍戶口帳內
豊北第十四五美洞第二統統首自統內第一戶
幼學金洛中年三十四辛卯豐山
父學生魯欽
生父通訓大夫前行弘文館副修撰知製敎>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文臣兼
宣傳官斗欽
祖學生復亨
曾祖學生宗一
外祖學生李潤白全義
李氏年三十五庚寅眞城
通訓大夫前行洪州牧使洪州鎭兵馬僉節制使彙載
祖學生林淳
曾祖通德郞龜紹
外祖學生裴憲邦達成
率子童蒙秉五年十四辛亥
率奴遷石年丁丑外居奴壬石年己巳丙申逃奴遷孫年辛巳外居婢幸每
年己卯父私奴祿只母班婢莫心幸每一所生婢雙女大榮小榮幷年壬寅父
良人崔哥乭名年戊戌父私奴壬三母班婢辛每又蓮年壬寅父良人
母班婢福浪点蓮年乙巳父母上仝外居婢龍切年庚寅父私奴達金
母班婢福乃廣今年乙巳父私奴徐凡母班婢順女外居婢同切年丁亥
父私奴丁戌母班婢金嬉 [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