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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2년 김성탁(金聖鐸)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3+KSM-XA.1732.1100-20110630.00902220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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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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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김성탁, 이조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732
형태사항 크기: 55 X 78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천전 의성김씨 제산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32년 김성탁(金聖鐸) 고신(告身)
1732년 9월에 이조에서 영조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전 참봉김성탁통덕랑 행 정릉참봉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통덕랑은 정5품이고, 참봉은 종9품직으로 조선 시대 관직의 가장 아래에 위치해있다. 문과 급제를 하지 않는 경우 보통 참봉을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간다. 김성탁은 이 자리에 노모의 병이 위중하다는 이유로 사직 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는다. 이후 영조김성탁의 학문에 지극한 관심을 보이면서 여러 차례 요직으로 부르지만 결국 나아가지 않고 1737이현일의 신원상소를 올렸다가 정의에 유배되어 풀려나지 못한 채 1747년에 사망한다.
최연숙

상세정보

1732년 9월, 이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전 참봉김성탁통덕랑 행 정릉참봉에 임명하는 문서
[내용 및 특징]
1732년(英祖 8) 9월에 이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전 參奉金聖鐸通德郞 行 靖陵參奉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통덕랑은 정5품 상계, 참봉은 종9품직이다. 김성탁은 관품이 관직보다 높기 때문에 조선시대 行守法에 따라 ‘行’을 관품 뒤, 관사 앞에 명시하였다. 정릉은 조선中宗의 능으로, 서울강남구삼성동에 있다.
김성탁1730년에 영릉참봉에 임명되었다가 노모의 병을 들어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정릉참봉에 임명되었다가 노모의 병으로 또다시 부임하지 않는다. 실록 기사에 의하면 1731년 2월 27일에 영조慶尙道暗行御史李潝을 引見하는 자리에서 이흡김성탁을 각별히 조용할 것을 청한 내용이 보이는데 이때부터 김성탁영조의 관심을 받게 된다. 이후 영남의 사림 가운데 成爾鴻·金聖鐸·李槾等을 각별히 調用하기를 청하는 경삼감사의 청이 이어지는데 1734년 11월 5일에는 영조司畜署別提의 신분인 김성탁비국을 인견하는 자리에 함께 입시하도록 하고, 11월 7일에는 召對에, 11월 10일에는 지방관의 留待에 함께 입시하라는 파격적인 명을 내려 김성탁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김성탁영조가 계속 요직으로 부르지만 나가지 않고, 1737李玄逸의 伸寃疏를 올렸다가 旌義에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 풀려나지 못하고 1747년에 사망한다.
이 문서는 5품 이하의 문무관원에게 발급되는 敎旨이다. 4품 이상이 臺諫의 署經을 거치지 않고 왕명에 의해 바로 임명되는데 비해, 5품 이하 9품까지는 대간의 서경을 거쳐 이조, 병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발급한다. 문서식도 4품 이상 관원에게 발급하는 것과는 다르다. 4품 이상 관원에게 발급하는 告身에서 문서 첫머리에 ‘敎旨’를 쓰는 것과 달리 5품 이하 관원에게 발급하는 고신에는 이조병조가 왕의 명을 받들어 임명장을 발급한다는 의미의 ‘奉敎’를 쓴다. 문서 발급에 있어서 착명은 이조병조의 당상관과 낭관 각 1인이 하였는데, 이 문서의 발급에는 이조판서만이 참여하고 있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32년 김성탁(金聖鐸) 고신(告身)

吏曹雍正十年九月
十一日奉
敎前參奉金聖鐸
通德郞行
靖陵參奉

雍正十年九月 日
判書[着名]
參判
參議
正郞
佐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