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4년 1월 23일, 김성구가 아우의 장례를 치른 것을 위로해 준 상대에게 감사드리기 위해 쓴 편지
[내용 및 특징]
1694년 1월 23일, 김성구가 아우의 장례를 치른 것을 위로해 준 상대에게 감사드리기 위해 쓴 편지이다. 상대의 정이 담긴 편지를 받은 후 새해에 조용히 지내는 상대의 기거하는 상황이 큰 복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어 간절히 축하하는 마음을 전달하며 인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근황으로, 어제 죽은 아우의 장례와 그에 관한 감회, 막내아이의 병세를 언급하며 슬픔에 잠겨있는 상황을 알렸다. 또한 항상 자신을 생각 해 주는 상대의 마음에 대해 한번이라도 달려 나가 감사를 드리지 못함을 죄송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렸다. 자신의 딸이 1월 8일에 아들을 순산했다는 소식과 곧 삼칠일이 다가 올 것이라는 것, 나머지 손자들도 모두 잘 지내고 있는 점 등을 알리며, 정신이 없어 이만 줄이니 정으로 살펴달라고 했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는 중앙에 내용을 기록한 뒤, 위쪽 상단부분에 시계반대방향으로 90도를 돌려서 기록했다. 그리고 이 편지는 여러 건의 문서와 함께 묶여 있다. 편지에는 특정한 연관성은 없어 보이며, 풍양조씨 집안에서 보관의 편의를 위해 한데 묶어 놓은 것 같다.
김성구는 부친의 행장을 직접 지었는데, 그의 문집인 『팔오헌집』에 「선고가선대부행용량위부호군행장」이란 제목으로 실려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김추길(金秋吉, 1603~1686)의 자는 次說, 호는 鶴汀으로 정경세의 문인이다. 배위는 전주유씨 유화동의 딸로 3남 2녀를 두었다. 세 아들은 김성후, 김성구, 김성유이며, 딸은 곽재주와 김종호에게 시집갔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 편지를 보낼 당시에 죽은 동생은 김성유로 짐작된다. 또한 『팔오헌집』의 이광정이 지은 김성구의 묘갈명에 의하면, 김성구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여건(金汝鍵), 김여용(金汝鎔), 김여당(金汝鏜), 김여병(金汝鈵)이며, 딸은 조해(趙瀣)와 홍서구(洪瑞龜)에게 시집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편지가 풍양조씨 가문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성구가 사위의 집안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
『八吾軒集』, 김성구,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