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0년 3월 27일, 김성후․ 김성유 등이 질녀의 해산에 좋은 약재의 처방을 해 준 상대에게 쓴 편지
[내용 및 특징]
1690년 3월 27일, 김성후․ 김성유 등이 질녀의 산기(産氣)에 좋은 약재의 처방을 해 준 상대에게 그대로 해서 복용시켰음을 알리려고 수취인 미상에게 쓴 편지이다. 전에 상대를 봤을 때 조용히 모시고 이야기 했어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해 서운하던 끝에 뜻밖에 상대의 편지를 받게 되었고, 그 편지로 그가 편안히 기거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감사하고 위로가 되었다고 했다. 자신들은 겨우 전과 같이 살고 있으며, 오랫동안 서울 소식을 듣지 못해 마음이 울적하다고 했다. 또한 질녀의 산기가 머지않아 마음 놓을 겨를이 없으며, 예전에 상대가 가르쳐 준 대로 불수산(佛手散)을 조제하여 질녀에게 복용시켰음을 알렸다. 바빠서 다 쓰지 못하고 정으로 살펴달라며 당부했다. 추록으로 노곡 조형이 갑자기 병이 생겼다가 심해졌다고 했다. 이후 내용은 훼손으로 인해 살필 수 없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내용이 길지 않기 때문에 회전형식에 이르지는 않았다. 다만 추록은 위쪽 여백에 기록했다.
이 문서는 여러 건의 편지와 함께 묶여 있다. 편지에는 특정한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아마도 풍양조씨 집안에서 보관의 편의를 위해 한데 묶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이 편지는 질녀의 해산에 좋은 약재를 처방 해 준 상대에게 그대로 약을 만들어 썼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쓴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약제의 명칭을 알 수 있는 등 당시의 의약에 관한 활동 및 정보를 간접적으로 나마 확인 할 수 있게 해 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김성구는 부친의 행장을 직접 지었는데, 그의 문집인 『팔오헌집』에 「선고가선대부행용량위부호군행장」이란 제목으로 실려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김추길(金秋吉, 1603~1686)의 자는 次說, 호는 鶴汀으로 정경세의 문인이다. 배위는 전주유씨 유화동의 딸로 3남 2녀를 두었다. 세 아들은 김성후, 김성구, 김성유이며, 딸은 곽재주와 김종호에게 시집갔다. 또한 『팔오헌집』의 이광정이 지은 김성구의 묘갈명에 의하면, 김성구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여건(金汝鍵), 김여용(金汝鎔), 김여당(金汝鏜), 김여병(金汝鈵)이며, 딸은 조해(趙瀣)와 홍서구(洪瑞龜)에게 시집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편지가 풍양조씨 가문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성후, 김성유 형제가 자신들에게는 조카사위가 되고, 김성구에게는 맏사위가 되는 조해의 집으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八吾軒集』, 김성구,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