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908년 김창섭(金昌燮) 호구단자(戶口單子)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2+KSM-XD.1908.4717-20100731.001524600002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작성주체 김창섭, 풍산현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작성시기 1908
형태사항 크기: 52.7 X 31.9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오미 풍산김씨 허백당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908년 김창섭(金昌燮) 호구단자(戶口單子)
안동 풍북면 오미동 1통 3호에 사는 김창섭이 1908년에 풍산현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김창섭의 나이는 39세였고, 부양가족으로 61세의 모와 41세의 처, 그리고 5세의 딸과 3세의 아들 김상봉을 기록했다. 다. 의탁하여 사는 가족으로 44세의 이두원과 그의 처, 그리고 딸 연화와 아들 복이를 기록했으며, 집의 규모는 10칸이었다. 여종 1구를 기록했는데, 1907년의 문서에는 ‘마순’으로 기록한 반면 이 문서에는 ‘마순이’로 기록했다. 보고 당시의 나이를 17세와 18세로 기록한 것으로 볼 때, 동일인으로 보인다.
정명수

상세정보

1908년, 풍북면오미동에 사는 김창섭이 가족원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문서
[내용 및 특징]
1908년(隆熙 2)에 安東豊北面五美洞 1통 3호에 사는 金昌燮豊山縣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김창섭의 당시 나이는 39세이고, 본관은 豊山이며, 參奉을 지냈다. 統戶番 위에는 이 호구단자를 제출한 해의 干支를 써 넣었다. 1896년 이후 統戶는 기존의 5家 1統에서 10家 1統으로 변경, 편성되었다. 관에서는 통호와 등재된 사람 위에 朱點을 찍은 다음 관인을 찍어 김창섭에게 돌려준 것이다.
김창섭의 가족으로는 모 李氏(61세), 처 柳氏(41세), 5세된 딸과 아들 象鳳(3세)이 있다. 딸의 나이는 원래 6세인데 잘못 기재되었다. 모의 본관은 驪州, 처의 본관은 豐山인데, 본관을 뜻하는 글자로 ‘本’ 대신 ‘籍’을 쓰고 있으며, 모 앞에는 어른을 모신다는 의미의 ‘奉’자를, 처 앞에는 거느린다는 의미의 ‘率’자를 넣어 구분하였다. 김창섭秉均의 아들로 秉鈺의 양자가 되어 풍산김씨 虛白堂 金楊震 문중의 16대 종손이 되었다. 김창섭의 부는 秉鈺, 조부는 洛中, 증조부는 魯欽, 외조부는 李在徵이다. 四祖는 관직과 함께 외조부이면 그 본관까지 밝히고, 모와 처에 대해서도 본관을 밝히고 있어 집안의 관직 내력과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다.
1896년 9월 1일 勅令으로 호구조사규칙과 內部令으로 호구조사세칙을 공포, 시행하면서 수백여 년 동안 지속되어오던 조선시대의 호적제도가 폐지되고 새로운 호적제도가 도입되었다. 기존에는 3년에 한 번 호구단자를 작성하였으나 이후로는 매년 1월에 戶籍表와 統表를 작성하도록 하였고, 호주와 처의 四祖를 함께 기재하던 것이 호주의 사조만 기재하도록 함으로써 처의 世系 파악은 폐지되었다. 또한 호구수 외에 家宅에 관한 기재사항을 추가하여 자기 소유인지 빌린 것인지, 형태가 초가집인지 기와집인지, 몇 칸인지를 기재하도록 하였다. 이 집안에는 가족 외에 婢 1구와 한 가족으로 보이는 寄口 4구가 있는데 이름과 나이를 표시하였으며, 기와집 10칸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료적 가치]
이 문서는 신호적제도가 공포된 이후 작성된 문서지만 규격화된 호적표에 작성하지 않고 기존의 방식대로 호구단자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가족원과 노비 현황을 별행으로 列書하는 것은 기존의 방식을 보이면서도, 10家 1統에 따른 거주지 표시와 가택에 대한 기재 및 처의 사조를 등재하지 않고 가족원 외에 寄口를 등재한 것은 신호적제도의 방식을 따르고 있어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갑오개혁 이후 변화된 공문서 양식을 수용하기까지의 과도기적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풍산김씨세보』에는 김창섭이 2남 2녀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들은 金元在와 金亨在이고, 딸은 李起鎬와 李承海에게 시집갔다. 큰 아들 김원재는 1906년 9월 4일에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에는 아들의 이름을 김상봉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뒤에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近代 公文書의 誕生』, 김건우, 소와당, 2008
文現妵, 韓國學中央硏究院 碩士學位論文, 2009
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08년 김창섭(金昌燮) 호구단자(戶口單子)

安東豊北面五美洞戊申戶籍第一統內三戶
參奉金昌燮年三十九庚午豐山
父學生秉鈺
生父學生秉均
通德郞洛中
曾祖學生魯欽
外祖學生李在徵驪州
奉母李氏年六十一戊申驪州
率妻柳氏年四十一戊辰豐山
女年五歲癸卯
象鳳年三歲丙午
馬順伊年十八辛卯
寄口李斗元年四十五甲子
李姓年三十己卯
蓮花年九歲庚子
卜伊年六歲癸卯
瓦家十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