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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김창섭(金昌燮) 호구단자(戶口單子)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2+KSM-XD.1903.4717-20100731.00152460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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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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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작성주체 김창섭, 풍산현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작성시기 1903
형태사항 크기: 48.1 X 51.1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오미 풍산김씨 허백당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903년 김창섭(金昌燮) 호구단자(戶口單子)
김창섭이 1903년에 풍북면 오미동의 담당 관청인 풍산현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이 문서는 김창섭 자신이 본인의 인적사항과, 부양가족의 현황, 노비이 수, 집의 규모를 작성해서 관청에 제출한 것으로, 관청에서는 사실여부를 붉은색으로 칠해가며 확인하고 김창섭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 문서는 1896년에 새롭게 제정된 호구조사규칙을 충실하게 좇고 있다. 이보다 앞서서 제출한 김창섭의 호구단자에는 처의 조상을 매번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문서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 밖의 기록 내용인 부양가족, 노비의 수, 집의 규모에는 변화가 없다. 1907년에 제출한 호구단자에는 1903년도에 출생한 딸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명수

상세정보

1903년, 풍북면오미동에 사는 김창섭이 가족원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문서
[내용 및 특징]
1903년(光武 7)에 安東豊北面五美洞 3통 8호에 사는 金昌燮豊山縣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김창섭의 당시 나이는 34세이고, 본관은 豊山이며, 幼學의 신분이다. 거주지 기재에 있어 조선 후기의 통호가 고정적이지 않고 식년마다 변경되었던 반면, 1896년 이후 부여된 통호번은 가옥에 부여한 고정번호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1907년 1통 3호로 바뀌기까지 김창섭의 주소는 3통 8호에서 변동이 없다. 統戶番 위에는 호구단자를 제출한 해의 干支를 써 넣었으며, 문서 상단에 보이던 縣監의 署押이 왼쪽 하단 여백에 보인다. 관에서는 통호와 등재된 사람 위에 朱點을 찍고 고친 글자가 없다는 周挾無改印을 찍은 다음 縣監이 署押하고 官印을 찍어 김창섭에게 돌려준 것이다.
김창섭의 가족으로는 모 李氏(56세), 처 柳氏(36세)가 있다. 모의 본관은 驪州, 처의 본관은 豐山인데, 본관을 뜻하는 글자로 ‘本’ 대신 ‘籍’을 쓰고 있으며, 모 앞에는 어른을 모신다는 의미의 ‘奉’자를, 처 앞에는 거느린다는 의미의 ‘率’자를 넣어 구분하였다. 김창섭秉均의 아들로 秉鈺의 양자가 되어 풍산 김씨 虛白堂 金楊震 문중의 16대 종손이 되었다. 김창섭의 부는 秉鈺, 조부는 洛中, 증조부는 魯欽, 외조부는 李在徵이다.四祖는 관직과 함께 외조부이면 그 본관까지 밝히고, 모와 처에 대해서도 본관을 밝히고 있어 집안의 관직 내력과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다.
1896년 9월 1일 勅令으로 호구조사규칙과 內部令으로 호구조사세칙을 공포, 시행하면서 수백여 년 동안 지속되어오던 조선시대의 호적제도가 폐지되고 새로운 호적제도가 도입되었다. 기존에는 3년에 한 번 호구단자를 작성하였으나 이후로는 매년 1월에 戶籍表와 統表를 작성하도록 하였고, 호주와 처의 四祖를 함께 기재하던 것이 호주의 사조만 기재하도록 함으로써 처의 世系 파악은 폐지되었다. 또한 호구수 외에 家宅에 관한 기재사항을 추가하여 자기 소유인지 빌린 것인지, 형태가 초가집인지 기와집인지, 몇 칸인지를 기재하도록 하였다. 이 집안의 당시 소유 노비는 2구로 이름과 나이를 표시하였으며, 기와집 10칸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료적 가치]
이 문서는 신호적제도가 공포된 이후 작성된 문서지만 규격화된 호적표에 작성하지 않고 기존의 방식대로 호구단자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가족원과 노비 현황을 별행으로 列書하는 것은 기존의 방식을 보이면서도, 10家 1統에 따른 거주지 표시나 가택에 대한 기재 및 처의 사조를 등재하지 않은 것은 신호적제도의 방식을 따르고 있어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갑오개혁 이후 변화된 공문서 양식을 수용하기까지의 과도기적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풍북면은 본래 안동부의 속현인 풍산현에 속해 있었다. 안동의 속현에는 임하, 길안, 일직, 풍산, 감천, 내성, 춘양, 재산이 있었다. 풍산현은 다시 풍현내, 풍남, 풍북, 풍서로 구분되었다. 『경상도읍지』에는 풍북에 소속된 동․리의 수를 11개로 기록하고 있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近代 公文書의 誕生』, 김건우, 소와당, 2008
文現妵, 韓國學中央硏究院 碩士學位論文, 2009
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03년 김창섭(金昌燮) 호구단자(戶口單子)

安東豊北面五美癸卯戶籍第三統內第八戶
幼學金昌燮年三十四庚午豐山
父學生秉鈺
生父學生秉均
通德郞洛中
曾祖學生魯欽
外祖學生李在徵驪州
奉母李氏年五十六戊申驪州
率妻柳氏年三十六戊辰豐山
成俊年四十二壬戌
興女年三十三辛未
瓦家十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