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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김창섭(金昌燮) 호구단자(戶口單子)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2+KSM-XD.1901.4717-20100731.0015246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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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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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작성주체 김창섭, 풍산현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작성시기 1901
형태사항 크기: 52.2 X 54.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오미 풍산김씨 허백당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901년 김창섭(金昌燮) 호구단자(戶口單子)
1901년 김창섭이 풍산현에 제출한 호구단자로, 그의 당시 거주지 주소는 안동 풍북면 오미동 3통 8호였다. 조선 후기에는 통호가 고정적이지 않았는데, 1896년부터는 통호를 가옥에 부여함으로서 호구단자를 제출할 때 고정적인 통호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보고 당시 김창섭의 나이는 32세였고, 부양가족은 모와 처가 있었으며, 노비가 각각 1구씩 있었다. 이 문서는 1896년 새롭게 제정된 호구조사규칙과 옛 규칙을 동시에 따랐다. 새로운 규칙에는 집의 가옥의 크기를 기록하게 했으며, 처의 조상은 기록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처의 조상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 때문인지 관에서 확인할 때 처의 조상을 기록한 부분에 붉은색으로 테두리를 그어놓았다.
정명수

상세정보

1901년, 풍북면오미동에 사는 김창섭이 가족원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문서
[내용 및 특징]
1901년(光武 5)에 安東豊北面五美洞 3통 8호에 사는 金昌燮豊山縣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김창섭의 당시 나이는 32세이고, 본관은 豊山이며, 幼學의 신분이다. 統戶番 위에는 호구단자를 제출한 해의 干支를 써 넣었다. 관에서는 통호와 등재된 사람 위에 朱點을 찍고 처의 四祖를 붉은 선 안에 넣어 표시하였는데, 이는 1896년 호구조사규칙에 처의 사조를 기재하지 말도록 하였기 때문에 확인의 필요성이 없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거주지 기재에 있어 조선 후기의 통호가 고정적이지 않고 식년마다 변경되었던 반면, 1896년 이후 부여된 통호번은 가옥에 부여한 고정번호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1907년 1통 3호로 바뀌기까지 김창섭의 주소는 3통 8호에서 변동이 없다.
김창섭의 가족으로는 모 李氏(54세), 처 柳氏(34세)가 있다. 모의 본관은 驪州, 처의 본관은 豐山인데, 본관을 뜻하는 글자로 ‘本’ 대신 ‘籍’을 쓰고 있으며, 모 앞에는 어른을 모신다는 의미의 ‘奉’자를, 처 앞에는 거느린다는 의미의 ‘率’자를 넣어 구분하였다. 김창섭秉均의 아들로 秉鈺의 양자가 되어 풍산 김씨 虛白堂 金楊震 문중의 16대 종손이 되었다. 김창섭의 부는 秉鈺, 조부는 洛中, 증조부는 魯欽, 외조부는 李在徵이고, 처의 부는 芝榮, 조부는 道鳳, 증조부는 致睦, 외조부는 李博祥이다. 처 유씨의 부는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을, 증조부는 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知製敎를, 외조부는 通訓大夫文川郡守安邊鎭營兵馬同僉節制使를 지냈다. 四祖는 관직과 함께 외조부이면 그 본관까지 밝히고, 모와 처에 대해서도 본관을 밝히고 있어 집안의 관직 내력과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다.
1896년 9월 1일 勅令으로 호구조사규칙과 內部令으로 호구조사세칙을 공포, 시행하면서 수백여 년 동안 지속되어오던 조선시대의 호적제도가 폐지되고 새로운 호적제도가 도입되었다. 기존에는 3년에 한 번 호구단자를 작성하였으나 이후로는 매년 1월에 戶籍表와 統表를 작성하도록 하였고, 호주와 처의 四祖를 함께 기재하던 것이 호주의 사조만 기재하도록 함으로써 처의 世系 파악은 폐지되었다. 또한 호구수 외에 家宅에 관한 기재사항을 추가하여 자기 소유인지 빌린 것인지, 형태가 초가집인지 기와집인지, 몇 칸인지를 기재하도록 하였다. 이 집안의 당시 소유 노비는 2구이며 기와집 10칸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료적 가치]
이 문서는 신호적제도가 공포된 이후 작성된 문서지만 규격화된 호적표에 작성하지 않고 기존의 방식대로 호구단자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가족원과 노비 현황을 별행으로 列書하고, 처의 사조를 기재하는 등 기존의 방식을 보이면서도, 10家 1統에 따른 거주지 기재와 가택에 대한 기재는 신호적제도의 방식을 따르고 있어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갑오개혁 이후 변화된 공문서 양식을 수용하기까지의 과도기적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안동시사』에는 ‘안동부에 직속된 부외 지역은 부내를 중심으로 방위에 따라 크게 동․서․남․북으로 구획되어 있었으나, 면리제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모두 선면․후면으로 세분되었다. 이러한 명칭은 안동부의 관문을 기준으로하여 각각의 방위 따라 가까운 곳은 선면, 상대적으로 떨어진 곳은 후면으로 명칭을 정한 결과였다. 예컨대 동선면은 관문에서 동으로 25리 떨어진 지역에 있었으며, 동후면의 경우 관문에서 같은 방향으로 30리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五陵·五美는 오미리의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풍산 김씨가 이곳에 정착한 것은 김자순 때부터이다. 이때에는 마을 이름을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있다고 해서 五陵洞이라 불렀다. 그 후 김의정이 을사사화 후에 낙향하여 五畝洞으로 고쳤는데 능이란 글자가 언덕을 뜻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해서 이랑 畝자를 넣어 五畝로 고친 것이다. 그 후 김대현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가운데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이 八蓮五桂라 하여 오미동이라는 지명을 하사하게 되자 오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近代 公文書의 誕生』, 김건우, 소와당, 2008
文現妵, 韓國學中央硏究院 碩士學位論文, 2009
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01년 김창섭(金昌燮) 호구단자(戶口單子)

安東豊北面五美洞辛丑戶籍第三統內第八戶
幼學金昌燮年三十二庚午豐山
父學生秉鈺
生父學生秉均
通德郞洛中
曾祖學生魯欽
外祖學生李在徵驪州
奉母李氏年五十四戊申驪州
率妻柳氏年三十四戊辰豐山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芝榮
通德郞道鳳
曾祖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知製敎致睦
外祖通訓大夫文川郡守安邊鎭營兵馬同僉節制使李博祥驪州
率奴成俊年四十壬戌
興女年三十二庚午
瓦家十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