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의동면에 사는 이중묵이 가족원의 인적사항과 소유노비 현황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문서
[내용 및 특징]
1885년(高宗 22)에 宜東面土界里 5戶에 사는 李中黙이 禮安縣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이중묵의 당시 나이는 36세이고, 본관은 眞寶이며, 幼學의 신분이다. 거주지는 관에서 朱墨으로 길게 줄을 그어 표시하고, 호주 위에 제5호라고 써넣었다. 호구단자의 거주지 기재는 호주가 호구단자를 제출하면 五家作統에 의해 정해진 각 가호의 통호번을 朱墨이나 黑墨으로 기입해 주는 것이 원칙적인 방법이지만 호주가 호구단자를 작성하면서 직접 기입해 제출하거나 통호를 비워두는 경우도 있었다. 통호 기재 방식은 1675년에 반포된 「五家作統事目」에 따른 것으로, 오가작통이란 조선시대 다섯 집을 한 統으로 묶은 행정자치조직을 말한다.
이중묵은 晩億의 양자로 들어왔는데, 생부 晩協(63세)을 모시고 있으며, 그 외 가족으로는 처 姜氏(42세), 두 아들 璧鎬(20세)와 服鎬(16세), 동생 中弘(26세)이 있다. 3년 뒤에 제출한 호구단자에는 당시 18세된 아들 瓚鎬가 등재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올라있지 않다. 호구단자의 기재 방식이 지역별, 가문별로 차이가 있는데, 이 집안에서는 호주와 호주의 四祖를 기재하고 가족원으로 두 아들과 동생을 처와 처의 사조보다 먼저 기재하였으며, 가족원 중 처에 대해 본관을 뜻하는 글자로 ‘本’ 대신 ‘籍’을 쓰고 있다.
이중묵의 부는 晩億, 조부는 彚遠, 증조부는 泰淳, 외조부는 申冕周이며, 처 강씨의 부는 夏奎, 조부는 必應, 증조부는 橒, 외조부는 權載弘이다. 이중묵의 증조부는 嘉善大夫 行 兵曹參判을 지냈으며, 외조부는 通政大夫 行 承政院同副承旨 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을 지냈다. 처 강씨의 부는 通政大夫 前 行 吏曹參議를 지냈고, 증조부는 通訓大夫 行 世子侍講院弼善을 지냈다. 四祖는 관직과 함께 외조부이면 그 본관까지 밝히고, 처에 대해서도 본관을 밝히고 있어 집안의 관직 내력과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다.
이 문서에서는 거주지와 가족원의 사이를 상당히 두고, 노비 현황을 문서 하단 왼쪽에 현격하게 낮추어 기재하여 班常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드러내었다. 각 가족 구성원 및 소유노비는 별행으로 列書하였는데 이는 17세기 이후 대체적인 호구단자의 특징이다. 현재 파악되는 노비는 8구로, 2구만 이름과 나이를 쓰고 나머지 6구에 대해서는 이름만 간단하게 기재하였으며, 외거노비에 대해서는 ‘外居’라 표시하였다.
호구단자는 국가에서 戶口臺帳을 3년마다 改修하기 위하여 各戶에서 호구상황을 적어 3년에 한차례 제출하는 것을 말한다. 주요 기재사항은 각호의 주소, 戶首의 직업·성명·생년·본관·四祖, 그 처의 성명·생년·본관·四祖, 率居子女의 성명·생년, 노비와 雇工의 성명·생년 등이다. 戶主가 호구단자 2부를 작성하여 올리면 里任․面任의 검사를 거쳐 州郡에 보내지고, 주군에서는 구 대장 또는 관계서류를 대조하여 誤錯여부를 확인한다. 이후 1부는 단자를 제출한 호주에게 환부하여 각 집안에 보관케 하고, 1부는 장적을 개수하는데 자료로 이용한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2부를 작성하여 제출하던 호구단자를 1부만 작성하고 거기에 곧바로 준호구에 찍던 周挾改字印을 찍어 돌려주게 된다. 이는 이전에 제출용 호구단자와 증명용 준호구가 공존하던 것이 이제는 호구단자만으로 준호구의 역할을 포괄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서 하단 여백에 대조․확인을 했다는 ‘准’을 쓰고 관인을 찍었다.
[자료적 가치]
호구단자는 호적제도를 정비하여 호구파악을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3년마다 작성되었으며, 여기에는 호주 및 처의 사조와 솔거자식 및 소유노비 현황을 자세하게 등재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들 문서를 통해 각 호구의 가족원과 관직 내력 및 혼맥, 소유노비수와 노비의 내력 및 노비 이동 경로, 그 지역내에서의 위상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지역별, 가문별 호구단자의 작성과 성별에 따른 단어 선택에도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묵의 증조부인 이태순의 『초초암문집』에는 가족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태순은 2남 3녀를 두었다. 첫째는 이휘원으로 생원이며, 둘째는 휘운이다. 이휘원은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만억, 이만유, 이만협이다. 이휘운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2남인 이만덕과 이만각은 각각 정언과 감역을 지냈다. 이만억은 이중묵으로 후사를 이었고, 이만유는 이중관으로 후사를 이었다. 이만협은 백형의 후사로 보낸 이중묵과 이중홍, 중형의 후사로 보낸 이중관을 두었다. 이만덕은 이중간으로 후사를 이었고, 이만각은 이중목으로 후사를 이었다. 이중묵은 4남을 두었는데, 이벽호, 이민호, 이찬호와 이중관의 뒤를 이은 이무호이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崔承熙, 『奎章閣』7, 서울대학교 도서관, 1983
문숙자, 『藏書閣』 2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文現妵, 韓國學中央硏究院 碩士學位論文, 2009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