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년 9월, 영천군에서 가흥면에 거주하는 정약수의 가족원과 소유노비 현황을 계유년의 호구장적에 의거하여 정약수에게 베껴 발급해 준 문서
[내용 및 특징]
1813년(純祖 13) 9월에 榮川郡에서 可興面茁浦里 2統 3戶에 사는 丁若琇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준호구는 호주의 신청에 의해 발급하므로 영천군에서 정약수의 신청에 의해 동년에 成籍한 戶口帳籍에 의거해서 가족원과 소유노비 현황을 베껴 준 것이다. 정약수의 당시 나이는 53세이고, 본관은 羅州이며, 通訓大夫 行英陵令을 지냈다. 준호구는 호구단자와 마찬가지로 1675년에 반포된 「五家作統事目」에 따라 호주의 거주지에 統과 戶를 명시한다. 오가작통이란 조선시대 다섯 집을 한 統으로 묶은 행정자치조직을 말한다.
정약수의 가족으로는 처 李氏(26세), 제부 朴氏(39세), 아들 免敎(24세)와 자부 朴氏(24세), 아들 顯敎(19세)가 있다. 당시 3세된 아들 集敎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등재된 두 아들은 정약수가 첫째 부인 郭氏(본관은 玄風)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동생 若玟과 제부 金氏는 이름 뒤에 ‘故’라고 써서 이번 호구단자를 올리기 전에 죽었음을 알 수 있다. 가족원 중 처와 弟婦, 자부에 대해 예전과는 다른 표기방식을 보이는데 본관을 뜻하는 글자를 ‘本’ 대신 ‘籍’을 쓰고 있다. 정약수의 부는 載鍾, 조부는 志完, 증조부는 謙愼, 외조부는 金鐸이다. 증조부 정겸신은 1735년에 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처 이씨의 부는 之簡, 조부는 仁澤, 증조부는 昌一, 외조부는 禹達疇이다. 四祖에 대해서는 관직과 함께 외조부이면 그 본관까지 밝히고, 가족원의 처와 자부에 대해서도 본관을 밝히고 있어 집안의 관직 내력과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형식을 함께 가지고 있는 준호구이다. 준호구는 連書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문서는 가족원과 四祖에 대해서는 別行하여 列書하였고, 소유 노비는 연서하면서도 仰役奴, 仰役婢, 外方奴婢를 줄을 바꾸어 구분하였다. 각각의 노비에 대해 이들의 이름과 나이, 부모의 이름과 신분, 이들의 현 상태 등을 밝히고 있으며, 솔거노비뿐만 아니라 도망노비도 기록하였다. 도망노비에 대한 기록은 관의 인증을 받아 推刷할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비의 기재 방식은 ‘奴’, ‘婢’, ‘私奴’, ‘班奴’, ‘班婢’, ‘院奴’, ‘捄活買得婢’ 등을 노비 이름 위에 표시하였는데, ‘私’와 ‘班’, ‘院’은 부모명을 칭할 때만 썼다. 노비 중에 구활매득비가 눈에 띄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이 집에서 구제 목적으로 사들여 종으로 삼았다는 말이다. 노비의 현 상태에 대해서는 이름 뒤에 ‘逃’, ‘故’를 써서 구분하였다. 앙역노비의 경우에는 노비의 이름뿐만아니라 부모의 이름과 나이, 신분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외방노비에 대해서는 대부분 이름만 간단하게 쓰고 있다. 당시 이 집안 노비는 모두 30구이다.
준호구는 호구장적에 의거하여 관에서 베껴 주는 문서를 말하는데, 오늘날의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호주의 신청에 의해 발급되는 것이 특징이다. 준호구의 발급은 주로 소송시 또는 성적시의 첨부자료로서, 또는 노비 推刷 자료로서, 또는 役과 관련하여 신분을 증명하거나 가문과시의 자료로 필요한 경우에 이루어졌다. 『經國大典』에 준호구식이 실려 있는데, 발급일과 발급관서를 먼저 쓰고, ‘考某年成籍戶口帳內’로 시작하여 호주의 거주지와 가족원, 호주와 처의 사조 및 소유노비에 대해 連書한다. 마지막에는 ‘相准’을 써서 준호구가 법전에서 정한 대로 작성하였으며 관의 확인을 거쳤음을 밝힌다. 이 문서는 行 郡守가 서압하고 수정한 글자가 없다는 周挾無改印과 官印을 찍어 발급하였다. 문서 오른쪽 여백에 唱準이 새겨진 검은 도장이 희미하게 보인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이후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문서식에 변화가 보이는데, 이 자료를 통해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형태가 문서내에 공존하고 있으며, 성별에 따른 단어 선택에도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줄포리의 현재 행정구역은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이다. 가흥동은 영천군 가흥면 지역으로 1914년 영주군 영주면에 편입되었다. 가흥동은 1, 2동으로 나누어져 있다. 가흥2동은 상줄동을 비롯해 몇 개의 동을 관찰하고 있는데, 상줄동의 옛 지명이 줄포이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崔承熙, 『奎章閣』7, 서울대학교 도서관, 1983
문숙자, 『藏書閣』 2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文現妵, 韓國學中央硏究院 碩士學位論文, 2009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