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년, 예안현에 사는 김태익이 가족원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문서
[내용 및 특징]
1786년(正祖 10)에 禮安縣邑內面月峴里 1統에 사는 金台翼이 예안현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김태익의 당시 나이는 51세이고, 본관은 光州이며, 幼學의 신분이다. 김태익은 이 해에 生員試에 壯元으로 합격하여 이후의 호구단자에는 生員으로 기재된다. 문서 오른쪽 첫째 줄 위에 제1호라고 朱墨으로 쓰고 거주지 위에는 길게 줄을 그어 표시하였다.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 위에 붉은 점을 찍어 놓았다. 호구단자의 거주지 기재는 호주가 호구단자를 제출하면 五家作統에 의해 정해진 각 가호의 통호번을 朱墨이나 黑墨으로 기입해 주는 것이 원칙적인 방법이지만 호주가 호구단자를 작성하면서 직접 기입해 제출하거나 통호를 비워두는 경우도 있었다. 통호 기재 방식은 1675년에 반포된 「五家作統事目」에 따른 것으로, 오가작통이란 조선시대 다섯 집을 한 統으로 묶은 행정자치조직을 말한다.
김태익의 가족으로는 처 李氏(51세), 아들 是瓘(29세)과 자부 李氏(29세)가 있다. 태익은 朝翼을 개명한 것이다. 6년 전의 호구단자에는 태익의 동생인 光翼의 처 朴氏가 등재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올라있지 않은데, 아마도 이때 박씨의 아들 是璞이 17세로 호주가 되어 別戶를 이루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김태익의 부는 績, 조부는 尙晉, 증조부는 碩昌, 외조부는 李申命이며, 이씨의 부는 世師, 조부는 守約, 증조부는 櫰, 외조부는 申弼貞이다. 이씨의 부 세사는 崇祿大夫 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조부 수약은 吏曹參判 兼 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증직되었다. 사조는 관직과 함께 외조부이면 그 본관까지 밝히고, 처에 대해서도 본관을 밝히고 있어 집안의 관직 내력과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다.
각 가족 구성원은 별행으로 列書하였는데 이는 17세기 이후 대체적인 호구단자의 특징이다. 이 문서는 노비현황 부분이 잘려나가 실제 이 집안에서 소유한 노비규모를 정확한 알 수 없다.
호구단자는 국가에서 戶口臺帳을 3년마다 改修하기 위하여 各戶에서 호구상황을 적어 3년에 한차례 제출하는 것을 말한다. 주요 기재사항은 각호의 주소, 戶首의 직업·성명·생년·본관·四祖, 그 처의 성명·생년·본관·四祖, 率居子女의 성명·생년, 노비와 雇工의 성명·생년 등이다. 戶主가 호구단자 2부를 작성하여 올리면 里任․面任의 검사를 거쳐 州郡에 보내지고, 주군에서는 구 대장 또는 관계서류를 대조하여 誤錯여부를 확인한다. 이후 1부는 단자를 제출한 호주에게 환부하여 각 집안에 보관케 하고, 1부는 장적을 개수하는데 자료로 이용한다. 이 문서는 관에서 확인한 후 호주에게 돌려준 단자라 볼 수 있다. 관에서는 김태익이 제출한 호구단자를 확인·대조하여 문서 하단에 붉은 글자로 “准”을 쓰고 관인을 찍어 김태익에게 돌려준 것이다. 문서 왼쪽에는 일부 잘려나간 “准”字와 관인이 보인다.
[자료적 가치]
호구단자는 호적제도를 정비하여 호구파악을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3년마다 작성되었으며, 여기에는 호주 및 처의 사조와 솔거자식 및 소유노비 현황을 자세하게 등재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들 문서를 통해 각 호구의 가족원과 관직 내력 및 혼맥, 소유노비수와 노비의 내력 및 노비 이동 경로, 그 지역내에서의 위상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광산김씨 설월당 종택이 있는 오천군자리의 이름은 한강 정구에게서 비롯된다. 정구가 안동대도호부사로 재임할 당시 오천을 방문하고는 ‘한집안 식구로서도 다 착하기가 어려운 법인데 오천 마을은 주민들 모두가 군자(君子) 아닌 사람이 없구나'하고 감탄하였고, 그 이후부터 오천을 ’군자리‘로 일컫게 되었다. 칠군자란 김부필, 김부의, 김부인, 김부신, 김부륜 다섯 형제와 그들의 외사촌인 금응협, 금응훈 형제를 말한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崔承熙, 『奎章閣』7, 서울대학교 도서관, 1983
문숙자, 『藏書閣』 2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文現妵, 韓國學中央硏究院 碩士學位論文, 2009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