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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년 김굉(金紘) 호구단자(戶口單子)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2+KSM-XD.1774.4717-20100731.00282460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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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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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작성주체 김굉, 예안현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작성시기 1774
형태사항 크기: 39.8 X 37.2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오천 광산김씨 설월당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74년 김굉(金紘) 호구단자(戶口單子)
예안현 읍내면 월현리 1통에 사는 김굉이 1774년에 거주지의 관할관청인 예안현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김굉의 당시 나이는 73세였고, 부양가족은 처 이씨, 며느리 이씨, 손자 김종찬(김시찬으로 개명)과 손주 며느리 정씨, 손자 김흥걸(김시환으로 개명)이다. 이처럼 개인이 자신의 신분과 조상, 그리고 부양가족을 기록해서 제출하면 관에서는 붉은색으로 덧칠을 하며 확인한다. 또한 ‘제9 월현리’와 ‘제1통 통수 솔노 만송’, ‘제1호’ 등은 확인하면서 기록한 것으로, 김굉이 살던 곳은 읍내면의 9번째 마을인 월현리의 1호이고, 당시의 제1통의 통수의 수노는 만송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솔거노비를 기록했을 것 같은 부분은 잘려져 나가서 당시 김굉 집안의 소유노비 현황은 파악할 수 없다.
정명수

상세정보

1774년, 예안현에 사는 김굉이 가족원의 인적사항과 소유노비 현황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문서
[내용 및 특징]
1774년(英祖 50)에 禮安縣邑內面月峴里 1統에 사는 金紘예안현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김굉의 당시 나이는 73세이고, 본관은 光州이며,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의 신분이다. 김굉이 당상관인 折衝將軍의 품계를 지녔기 때문에 처 이씨도 그에 맞는 정3품 外命婦 품계로 淑夫人을 받은 것이다. 子婦 李氏의 경우 宜人이라 하여 6품의 외명부 품계를 받고 있는데, 죽은 남편 聖翼이 6품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익1769년에 죽었다. 문서 오른쪽에는 관에서 朱墨으로 “제1통 統首 率奴 萬松”과 戶番을 써넣어 김시찬이 1통 1호에 거주하며 1통의 통수이고, 솔노로 만송이 있음을 밝혀 놓았다.
거주지는 관에서 朱墨으로 길게 줄을 그어 표시하고,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 위에 붉은 점을 찍어 놓았다. 호구단자의 거주지 기재는 호주가 호구단자를 제출하면 五家作統에 의해 정해진 각 가호의 통호번을 朱墨이나 黑墨으로 기입해 주는 것이 원칙적인 방법이지만 호주가 호구단자를 작성하면서 직접 기입해 제출하거나 통호를 비워두는 경우도 있었다. 통호 기재 방식은 1675년에 반포된 「五家作統事目」에 따른 것으로, 오가작통이란 조선시대 다섯 집을 한 統으로 묶은 행정자치조직을 말한다.
김굉의 가족으로는 처 淑夫人李氏(67세), 子婦 宜人李氏(41세), 손자 宗瓚(21세)과 손부 鄭氏(19세), 손자 興杰(17세)이 있다. 종찬是瓚으로, 흥걸是瑍으로 개명하였다. 김굉의 부는 尙晉, 조부는 碩昌, 증조부는 耀亨, 외조부는 金汝鎔이며, 김굉이씨의 부는 守泰, 조부는 , 증조부는 誠哲, 외조부는 金翰國이다. 처 이씨의 증조부 성철通訓大夫漢城府判官을 지냈다. 사조는 관직과 함께 외조부이면 그 본관까지 밝히고, 처에 대해서도 본관을 밝히고 있어 집안의 관직 내력과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다.
각 가족 구성원은 별행으로 列書하였는데 이는 17세기 이후 대체적인 호구단자의 특징이다. 이 문서는 노비현황 부분이 잘려나가 실제 이 집안에서 소유한 노비규모를 정확한 알 수 없다.
호구단자는 국가에서 戶口臺帳을 3년마다 改修하기 위하여 各戶에서 호구상황을 적어 3년에 한차례 제출하는 것을 말한다. 주요 기재사항은 각호의 주소, 戶首의 직업·성명·생년·본관·四祖, 그 처의 성명·생년·본관·四祖, 率居子女의 성명·생년, 노비와 雇工의 성명·생년 등이다. 戶主가 호구단자 2부를 작성하여 올리면 里任․面任의 검사를 거쳐 州郡에 보내지고, 주군에서는 구 대장 또는 관계서류를 대조하여 誤錯여부를 확인한다. 이후 1부는 단자를 제출한 호주에게 환부하여 각 집안에 보관케 하고, 1부는 장적을 개수하는데 자료로 이용한다. 이 문서는 관에서 확인한 후 호주에게 돌려준 단자라 볼 수 있다. 관에서는 김시찬이 제출한 호구단자를 확인·대조하여 문서 하단에 붉은 글자로 “准”을 쓰고 붉은 색의 官印 1개를 찍어 김시찬에게 돌려준 것이다. 호구단자를 확인한 唱準者 申㝡壽李昌直의 이름이 문서 하단 여백에 쓰여 있다.
[자료적 가치]
호구단자는 호적제도를 정비하여 호구파악을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3년마다 작성되었으며, 여기에는 호주 및 처의 사조와 솔거자식 및 소유노비 현황을 자세하게 등재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들 문서를 통해 각 호구의 가족원과 관직 내력 및 혼맥, 소유노비수와 노비의 내력 및 노비 이동 경로, 그 지역내에서의 위상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오천리는 예전에 예안군 읍내면 지역으로서 외내, 오천이라 불렸다. 1914년 무양동 일부와 북선면의 외감애동 일부, 동후면의 나소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천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시군 통합으로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가 되었다. 현재의 광산김씨 예안파 문화단지, 일명 군자리는 안동댐 수몰로 약 2km 이동한 것이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崔承熙, 『奎章閣』7, 서울대학교 도서관, 1983
문숙자, 『藏書閣』 2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文現妵, 韓國學中央硏究院 碩士學位論文, 2009
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74년 김굉(金紘) 호구단자(戶口單子)

第九月峴里
第一統統首率奴萬松
第一邑內面月峴里第統第戶
第戶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金紘年七十三壬午光州
父學生尙晉
通德郞碩昌
曾祖學生耀亨
外祖成均生員金汝鎔義城
淑夫人李氏年六十七戊子眞寶
父學生守泰
通德郞顯陵參奉
曾祖通訓大夫漢城府判官誠哲
外祖通德郞金翰國光州
率子婦宜人李氏年四十一甲寅眞寶
宗瓚是瓚年二十一甲戌
孫婦鄭氏年十九丙子淸州
興杰是瓊年十七戊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