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5년 1월, 경주부북면안강현에 사는 이종범이 가족원의 인적사항과 소유노비 현황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문서
[내용 및 특징]
1765년(英祖 41) 1월, 慶州府北面安康縣楊月坊에 사는 李宗範이 가족원의 인적사항과 소유노비 현황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이종범의 당시 나이는 53세이고, 본관은 경주이며, 幼學의 신분이다. 이종범의 호구단자는 統戶 없이 간지와 거주지만을 쓰고 “戶籍單刺”라 기재하였다. 호구단자의 거주지 기재는 호주가 호구단자를 제출하면 五家作統에 의해 정해진 각 가호의 統戶番을 朱墨이나 黑墨으로 기입해 주는 것이 원칙적인 방법이지만, 호주가 직접 기입해서 제출하기도 하였다. 통호 기재 방식은 1675년에 반포된 「五家作統事目」에 따른 것으로, 오가작통이란 조선시대 다섯 집을 한 統으로 묶은 행정자치조직을 말한다.
이종범의 가족으로는 率弟 龜範(50세), 아들 最英(24세), 조카 璁(19세), 첩 權召史(23세)가 등재되었으며, 龜範과 璁은 독립호로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종범의 부는 文在, 조부는 世碩, 증조부는 耈徵, 외조부는 鄭爾吉이다. 사조에 대해서는 관직과 함께 외조부이면 그 본관까지 밝히고, 가족원의 첩에 대해서도 본관을 밝히고 있어 집안의 관직 내력과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다. 이하로는 소유노비 현황을 기록하였다.
각 가족 구성원 및 소유노비는 별행으로 列書하였는데 이는 17세기 이후 대체적인 호구단자의 특징이다. 노비 현황은 몇 글자 낮추어 써서 가족원과는 확연하게 구별하였다. 각각의 노비에 대해 이들의 나이와 부모, 부모의 신분, 이들의 현 상태 등을 밝히고 있으며, 솔거노비뿐만 아니라 도망노비 및 外居노비의 거주지도 적어 놓았다. 도망노비에 대한 기록은 관의 인증을 받아 推刷할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비의 기재 방식은 ‘奴’, ‘婢’, ‘私奴’, ‘良人’, ‘良女’, ‘班奴’, ‘班婢’, ‘不知’ 등을 노비 이름 위에 표시하였는데, ‘私’와 ‘班’, ‘良人’, ‘良女’, ‘不知’는 부모명을 칭할 때만 썼다. 노비의 현 상태에 대해서는 이름 뒤에 ‘逃’, ‘逃亡’, ‘時居○○’ 등을 써서 구분하였다. 이종범의 당시 노비는 솔거노비 2구, 외거노비 42구, 도망노비 16구 등 모두 60구이다.
이 집안의 외거노비의 경우 新寧, 尙州, 柒谷, 大丘, 丹城, 永川, 靑松, 淸道, 昆陽, 英陽 등지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외거노비도 대부분은 도망노비이거나 후일 도망노비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1801년에 이종범의 손자인 李仁元이 제출한 호구단자에는 이들이 逃亡秩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거주지 파악이 안 된 도망노비에 대해서도 도망친 연도와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崇禎 丁丑年(1637), 順治 乙酉年(1645) 등 도망친 지 이미 100년이 지난 사람들까지 기재하고 있어 도망노비의 상당수가 虛數임을 알 수 있다. 거주지가 파악된 노비뿐만 아니라 파악되지도 않고 살아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이렇게 오랜 기간 기재하고 있는 것은 후일에 있을지 모르는 노비 추쇄를 대비한 것이다.
호구단자는 국가에서 戶口臺帳을 3년마다 改修하기 위하여 各戶에서 호구상황을 적어 3년에 한차례 제출하는 것을 말한다. 주요 기재사항은 각호의 주소, 戶首의 직업·성명·생년·본관·四祖, 그 처의 성명·생년·본관·四祖, 率居子女의 성명·생년, 노비와 雇工의 성명·생년 등이다. 戶主가 호구단자 2부를 작성하여 올리면 里任․面任의 검사를 거쳐 州郡에 보내지고, 주군에서는 구 대장 또는 관계서류를 대조하여 誤錯여부를 확인한다. 이후 1부는 단자를 제출한 호주에게 환부하여 각 집안에 보관케 하고, 1부는 장적을 개수하는데 자료로 이용한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2부를 작성하여 제출하던 호구단자를 1부만 작성하고 거기에 곧바로 준호구에 찍던 周挾改字印을 찍어 돌려주게 된다. 이는 이전에 제출용 호구단자와 증명용 준호구가 공존하던 것이 이제는 호구단자만으로 준호구의 역할을 포괄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호주인 이종범이 을유년인 이 해 1월에 호구단자를 관에 제출하자, 관에서는 이를 확인·대조하여 朱點을 찍고 붉은 색의 官印 1개를 찍은 뒤에 고친 글자가 없음을 확인하는 周挾無改印을 그 위에 찍었다. 府尹이 署押하고 이종범에게 돌려주었다. 이 호구단자를 확인·대조한 사람은 문서 마지막에 보이는 風憲 李某와 尊位 鄭某로 둘 다 着名하였다. 문서 마지막에 ‘戶李’는 이 호구단자를 작성한 이종범을 말한다.
[자료적 가치]
호구단자는 호적제도를 정비하여 호구파악을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3년마다 작성되었으며, 여기에는 호주 및 처의 사조와 솔거자식 및 소유노비 현황을 자세하게 등재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들 문서를 통해 각 호구의 가족원과 관직 내력 및 혼맥, 소유노비수와 노비의 내력 및 노비 이동 경로, 그 지역 내에서의 위상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이후 준호구의 증빙 역할까지 아우르는 호구단자의 변화를 볼 수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01-35호에 등록되었으며, 경주이씨 양월문중 소장 고문서이다.
『영천이씨세보』에 의하면 이구징(1609~1688)의 아들은 이세석(1643~1714)이고, 이세석은 이문재로 대를 이었다. 이문재의 아들은 이종범, 이구범, 이낙범이다. 이종범은 아들 이규성과 서자 이규표가 있고, 이규성은 아들 이인원이 있다. 이 호구단자에는 이종범의 아들을 이최영, 이구범의 아들을 이총으로 기록했는데, 각각 이규성과 이규낙으로 개명하였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崔承熙, 『奎章閣』7, 서울대학교 도서관,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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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