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4년 12월, 영해부에서 서면에 거주하는 이지현의 가족원과 소유노비 현황을 갑자년의 호구장적에 의거하여 이지현에게 베껴 발급해 준 문서
[내용 및 특징]
1684년(肅宗 10) 12월에 寧海府에서 西面仁良化里 16統 2戶에 사는 李之炫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준호구는 호주의 신청에 의해 발급하므로 영해부에서 이지현의 신청에 의해 동년에 成籍한 戶口帳籍에 의거해서 가족원과 소유노비 현황을 베껴 준 것이다. 이지현의 당시 나이는 46세이고, 본관은 載寧이며, 幼學의 신분이다. 준호구는 호구단자와 마찬가지로 1675년에 반포된 「五家作統事目」에 따라 호주의 거주지에 統과 戶를 명시하는데, 오가작통이란 조선시대 다섯 집을 한 統으로 묶은 행정자치조직을 말한다. 이 문서는 준호구의 형식에 따라 連書하면서도 노비 현황에 대해서는 몇 글자 낮추어 써서 신분상의 구분을 하였다.
이지현의 가족으로는 처 金氏(45세), 모 鄭氏(64세)가 있다. 처의 본관은 聞韶이고 모의 본관은 東萊인데, 본관을 뜻하는 글자를 “本” 대신 “籍”을 쓰고 있다. 모 정씨는 이지현의 부가 8품 承仕郞을 지녔기 때문에 그에 맞는 8품 外命婦 품계인 端人을 받은 것이다. 이지현의 부는 楷, 조부는 莘逸, 증조부는 時淸, 외조부는 鄭榮後이다. 부는 奉常寺奉事 兼 成均館學諭를 지냈으며, 외조부는 司宰監參奉을 지냈다. 처의 부는 燮, 조부는 是樞, 증조부는 潗, 외조부는 洪滈인데 『文科榜目』에는 “洪鎬”로 되어 있다. 처의 조부는 朝散大夫 行 安奇道察訪을, 증조부는 秉節校尉世子翊衛司洗馬를, 외조부는 通政大夫 行 司諫院大司諫을 지냈다. 四祖에 대해서는 관직과 함께 외조부이면 그 본관까지 밝히고, 가족원의 모와 처에 대해서도 본관을 밝히고 있어 집안의 관직 내력과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다.
가족원을 기재한 뒤에 소유노비에 대해 기재하였는데, 솔거노비뿐만 아니라 외거노비, 各戶를 이룬 노비, 도망노비도 기록하였다. 도망노비에 대한 기록은 관의 인증을 받아 推刷할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비의 기재에 있어 솔거노비와 그 외의 노비가 다른 방식을 보이는데, 솔거노비의 경우 각각의 노비에 대해 이들의 나이와 이름, 부모의 이름과 신분, 이들의 현 상태 등을 밝히고 있는 반면, 그 외의 노비에 대해서는 이름과 이들의 현 상태 정도만을 간략하게 밝혔다.
각각의 노비 이름 위에는 “奴”, “婢”, “私奴”, “寺奴”, “班奴”, “班婢”, “加現奴”, “良女召史”, “百姓” 등을 표시하였는데, “私”와 “班”, “寺”, “百姓”, “良女召史”는 부모명을 칭할 때만 썼다. 노비의 현 상태에 대해서는 이름 뒤에 “逃”, “逃亡”, “逃故”, “各戶”, “居○○”, “○○戶入” 등을 써서 구분하였다. 이 집안의 외거노비의 경우 慶州, 盈德, 平海에 거주하고 있으며, 주로 加西, 石保, 邑內, 黃竹, 仁良, 烏於里 등지에 各戶를 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지현이 소유한 노비는 솔거노비 18구, 각호를 세운 노비 46구, 외거노비 4구, 도망노비 6구, 죽은 노비 2구, 도망가 죽은 노비 3구, 동생 李之熲을 따라 나간 노 1구 등 모두 80구이다.
준호구는 호구장적에 의거하여 관에서 베껴 주는 문서를 말하는데, 오늘날의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호주의 신청에 의해 발급되는 것이 특징이다. 준호구의 발급은 주로 소송 시 또는 성적시의 첨부자료로서, 또는 노비 推刷 자료로서, 또는 役과 관련하여 신분을 증명하거나 가문과시의 자료로 필요한 경우에 이루어졌다. 『經國大典』에 준호구식이 실려 있는데, 발급일과 발급관서를 먼저 쓰고, ‘考某年成籍戶口帳內’로 시작하여 호주의 거주지와 가족원, 호주와 처의 사조 및 소유노비에 대해 連書한다. 문서 마지막에 이번 준호구는 1681년 신유년의 호구단자를 상고하여 成籍한 갑자년 호구장적에 의거한 것이며, 이에 준하여 발급한다고 밝혀 놓았다. 行府使가 서압하고 수정한 글자가 없다는 周挾無改印과 3개의 官印을 찍어 발급해 주었다.
[자료적 가치]
조선 중기의 준호구 발급 형태 및 지역에 따른 작성 방식의 차이를 살펴볼 수 있다.
국가지정문화제 보물 제876호로 등록되었다.
인량리 동명의 유래는 예부터 명현(名賢)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어진 분이 많이 난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뒷산의 지형이 학(鶴)이 날아갈 듯한 형국과 같다 하여 나래골, 또는 익동(翼洞), 비개동(飛蓋洞)이라 하다가 음이 변하여 나라골, 한자로 국동(國洞)이라고도 했다는 설이 있으며, 일설에는 삼한(三韓)시대에 우시국(于尸國)이라는 부족국가(部族國家)의 도읍지에서 나라골 즉, 국동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서면(西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인상동(仁上洞), 인하동(仁下洞)을 병합하여 인량동으로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인량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구역상 인량1,2리로 분동되어 있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崔承熙, 『奎章閣』7, 서울대학교 도서관, 1983
문숙자, 『藏書閣』 2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文現妵, 韓國學中央硏究院 碩士學位論文, 2009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