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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김익흠(金益欽) 외 58인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2+KSM-XB.1892.4717-20100731.0015231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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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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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김창섭, 김규영, 김낙헌, 용궁현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작성시기 1892
형태사항 크기: 90 X 52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오미 풍산김씨 허백당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92년 김익흠(金益欽) 외 58인 상서(上書)
김익흠 등 59명이 연명하여 1892년 1월에 이재순을 고발하는 문서이다. 학호 김봉조의 묘소가 있던 마전산의 소나무를 베어내고 사대부를 능멸했다는 이유이다. 마전산은 용궁현에 있기 때문에 산의 소재지인 용궁현감에게 올린 것이다. 이재순의 조부와 부는 풍산김씨의 선산을 관리하던 묘노였는데, 자신이 서울 양반가의 양자로 들어가서는 양반행세를 하고, 산 아래에 있는 소나무도 자신의 소유라며 함부로 베어냈다는 것이다. 용궁현에서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당장 다스리지 않으면 후일의 폐단을 막을 수 없으므로 속히 잡아들이라고 장교에게 제음을 내렸다.
정명수

상세정보

1892년 1월, 유학 김익흠 외 58인이 풍산김씨 선산의 송추를 함부로 벤 이재순을 처벌해 달라고 용궁현감에게 연명으로 요청한 문서
[내용 및 특징]
1892년(高宗 29) 1월에 金益欽 등 풍산김씨 59인이 산 아래에 사는 李在順을 고발한 문서로, 선산의 墓奴로 있었던 사람이 함부로 선산의 松楸를 베고 사대부를 능멸했다는 이유이다. 풍산김씨의 선조인 鶴湖公의 묘소가 龍宮縣麻田山에 있기 때문에 이 소지를 용궁현감에게 올린 것이다. 상서의 대표자는 幼學金益欽, 金文欽, 金昌燮이고, 풍산김씨 56인이 연명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학호공의 묘소를 이곳에 쓴 지 70여년 동안 아무런 문제없이 수호했는데 이재순이라는 자가 10여년 동안 서울 양반가에 양자로 들어갔다고 하며 양반 행세를 하더니 거리낌없이 자기네 분묘를 먼저 마전산에 써서 수호해왔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재순은 자신뿐만아니라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까지 풍산김씨 선산을 관리하던 墓奴라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감히 양반 행세를 하고 작년 7월에는 風落松 몇 그루를 베어갔고, 이에 대해 몇 대 동안 묘노를 지냈다는 정리로 1냥을 받고 용서해주려 하였더니 도리어 산 아래에 있는 어린 소나무 수십 그루를 자기 소유라고 함부로 베어갔다고 하였다. 이치로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 것 물론이고 근거 없는 말로 모욕하기까지 하기에 분한 마음으로 소장을 올리는 것이니, 붙잡아다가 엄하게 처벌하고 소나무 값을 징수함으로써 풍속을 바로잡고 후일의 폐단을 없게 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22일에 소지를 접수한 용궁현에서는 지금은 묘노 신분이 아니지만 조부 때부터 대대로 사대부가의 산소를 수호해 온 사람이 지금에 와서 양반 행세를 하며 함부로 송추를 베고 사대부를 능욕하여 개인이 다스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사람을 당장 다스리지 않으면 후일의 폐단을 막을 수 없으므로 속히 붙잡아 들이라고 將校에게 題音을 내렸다.
김익흠 등이 용궁현감에게 이재순을 고발하며 처벌의 근거로 내세운 것은 첫째가 묘를 쓰고 70여년 동안 아무 문제없었다는 점과 이재순이 사대부가의 묘노 신분으로 양반을 능욕했다는 점이다. 신분제사회에서 종의 신분을 띠었던 자가 감히 양반을 능멸한 행위는 이미 용서받기 힘든 것이기에 용궁현감은 즉시 잡아들이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김익흠 등은 용궁현감에게 자신들을 “民”이라고 하였는데, 『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우리나라 郡邑의 士族과 品官 및 서울의 公卿과 士人들은 자기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고을의 수령에게 官과 民의 分義가 있어 그 고을의 수령에 대해 자신을 化民이라 하거나 혹은 한 글자로 民이라 칭하며 그 수령을 城主라 부른다고 하였다. 김익흠 등이 자신들을 양반을 지칭하는 “民”이라 쓰고, 이재순에게는 상것을 뜻하는 “漢”을 쓴 것을 바로 자신들이 이재순과는 엄연히 다른 신분임을 보이기 위한 의도임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도는 이 사건 처리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드는 장치로 작용하였다.
이 문서는 연명으로 올리는 상서로, 상서의 내용은 山訟과 孝行․卓行의 旌閭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문서의 형식은 먼저 상서한 자의 거주지, 신분직역, 성명을 쓰고, 행을 바꾸어 상서 내용을 쓴다. 마지막에는 상서에 참여한 연명자의 신분직역과 이름을 써서 관에 제출한다. 상서를 접수한 관에서는 판결문인 제음을 내리는데 제음은 상서의 내용보다 짙고 크게 써서 상서 내용과 구분하였다. 문서의 좌상단 윗부분에는 “官”字를 揮筆하고 그 아래에 서압을 하며, 제음의 내용은 문서 좌하단에 쓰고 제음의 군데군데 적색의 官印을 찍는다. 제음의 내용이 길어지면 보통은 뒷면에 이어서 쓴다. 이 문서에는 “官”자 없이 바로 서압만 하였다.
『풍산김씨세보』에는 김봉조의 묘가 광석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전산은 그 이칭이다.
용궁현은 축산(竺山), 원산(園山), 용주(龍州)등으로 불려오다가 1012년 용궁현이 되었다. 1895년 군으로 승격되었으나 1914년에 군을 폐하고 신하면(申下面)은 의성군에, 나머지는 예천군에 편입하여 그 일부지역은 용궁면으로 남아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예천군 용궁면이다.
『五洲衍文長箋散稿』, 李圭景,
『韓國法制史攷』, 朴秉濠, 法文社, 1983
全炅穆, 『古文書硏究』 , 한국고문서학회, 1994
『朝鮮後期 山訟 硏究』, 全炅穆, 전북대박사학위논문, 1996
김경숙, 『규장각』 25,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02
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92년 김익흠(金益欽) 외 58인 상서(上書)

▣▣(安東)五美洞居民幼學金益欽金文欽金昌燮等謹齋沐上書于
龍宮城主閤下伏以天下之事變無常古今之人心殊途而豈有如今日山下居李在順之所爲者乎治下麻田山卽民等先祖
公墓所也入葬七十餘年局內松楸無弊守護而所謂李在順自渠祖渠父以至渠身而爲守護之墓奴矣挽近十餘年稱以
入系京族卒行班名故敢生無嚴無忌憚之心托以渠墳之先入山麓從某至某謂渠之守護前年七月風落松數株任意斫去當
依法受贖而民等以其累世墓奴之故只以一兩文和好矣容貸之地反生姦猾之計又於山下渠田上穉松謂以渠松有數十株亂斫之
境政所謂失於厚者也民等以理責諭則右漢拈出來無古無今無憑無據之說凌辱一門罔有紀極其橫豎悖談有不忍提不忍
說者矣世豈有以墓奴而反侵守護凌辱士夫乎民等不勝憤惋玆敢聯名仰訴伏乞洞燭敎是後右漢捉致嚴刑以徵松
贖以正風化俾無日後之弊千萬祈懇之至
行下向敎是事
龍宮城主閤下 處分
壬辰正月 日 幼學 金峻欽
金重八
金守欽
金奎五
金奎烔
進士 金奎永
幼學 金友欽
金寬欽
金佑欽
金景欽
金舜欽
金慶欽
金寅欽
金勗欽
金洛鼎
金洛鉉
金運欽
金尙欽
金洛圭
金洛銓
金洛成
金洛星
金洛瑞
金洛書
金洛鱗
金洛升
金騏洛
進士 金洛獻
金秉禧
金洛鏞
金洛均
金洛淸
金洛鎭
金鳳洛
金冕洛
金驪洛
幼學 金秉吉
金東燮
金秉直
金秉烈
金洛璇
金洛雲
金世洛
進士 金秉浩
金禎洛
幼學 金秉瓛
金在昌
金秉天
金秉麟
金洛耆
金洛禹
金秉裕
金鼎燮
金堯欽
金冕秀
金泰秀


[題辭]
雖非當日墓奴
自七十年來渠

祖渠父爲士夫
家山所世世守
護是如加今忽
托以班族亂
斫松楸甚
至於凌辱
士夫私自
難治之境
痛惋極矣
如許悖類
未卽徵勵
後弊難
李在順
星火捉致

卄二日
將校
[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