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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 조석우(趙錫愚)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2+KSM-XA.1759.1100-20100731.0230222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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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영조, 조석우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759
형태사항 크기: 55 X 7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승곡 풍양조씨 입재공파종택 /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59년 조석우(趙錫愚) 고신(告身)
1759년(英祖 35) 윤6월 6일에 영조 임금이 조석우에게 중훈대부 행 평안도도사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도사는 관찰사를 보좌하여 함께 문서와 장부를 처결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아사라고도 불렸다. 정5품의 병조정랑에 임명된지 3일만에 다시 평안도도사에 임명된 것인데, 그 내용은 조석우의 문집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유치명이 지은 행장에는 사은하고 물러나며 벗에게 말하기를, 내 한번 관서에 나아가 태백산에 들어가서 단군고사의 통군정을 방문해 보고자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정종로가 지은 「묘갈명」에는 평안도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이날 말을 타고 고향에 돌아와 거친 밥과 국을 먹으며 태연히 자적하며 다시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으며 동생인 조석로와 함께 책상을 나란히 하고 공부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古文書硏究』 9·10, 鄭求福, 한국고문서학회, 1996
『古文書硏究』 30, 유지영, 한국고문서학회, 2007
『韓國史論』4, 張炳仁, 서울대학교, 1978
『풍성세고』, 趙靖 등, 1921
정명수

상세정보

1759년 윤6월 6일, 영조조석우중훈대부평안도도사에 임명하는 문서
내용 및 특징
1759년(英祖 35) 윤6월 6일에 英祖趙錫愚中訓大夫平安道都事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조석우는 동년 윤6월 3일에 정5품 병조정랑에 임명되었다가 3일 만에 종5품 평안도도사에 임명된다. 도사관찰사를 보좌하여 함께 文簿를 처결하고 一道를 專制하였으므로 亞使라고도 하고, 관찰사의 유고시에는 그 직임을 대행하기도 하여 亞監司라고도 하였다. 정5품 병조정랑에 임명되었던 조석우가 3일 만에 한 품계 낮은 종5품 평안도도사직에 임명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승정원일기1759년 기사를 보면 윤6월 3일과 6일에 정사가 열려 관직 임명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 임명된 자 가운데 조석우와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이 있다. 예조정랑에 임명되었던 洪秀輔조석우와 마찬가지로 3일 만에 전라도도사로 한 품계 낮게 임명이 된 것이다. 정6품에서 정5품으로의 2등급 승급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이는 아마도 문서행정상의 착오로 빚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문서는 臺諫의 署經을 거치지 않고 왕명에 의해 바로 발급하는 임명장으로, 4품 이상의 관원을 임명할 때 쓰인다. 조석우는 관직은 종5품직이지만 관품이 종3품계이기 때문에 5품 이하직에 발급하는 敎牒이 아니라, 4품 이상직에 발급하는 告身을 발급한 것이다. 조석우는 관품이 관직보다 높기 때문에 조선시대 行守法에 따라 ‘行’을 관품 뒤, 관사 앞에 명시하였다.
『풍성세고』 권6의 『존성재고』에는 정종로가 지은 「묘갈명」이 실려 있는데, 평안도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이날 말을 타고 고향에 돌아와 거친 밥과 국을 먹으며 태연히 자적하며 다시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으며 동생인 조석로와 함께 책상을 나란히 하고 공부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古文書硏究』 9·10, 鄭求福, 한국고문서학회, 1996
『古文書硏究』 30, 유지영, 한국고문서학회, 2007
『韓國史論』4, 張炳仁, 서울대학교, 1978
『풍성세고』, 趙靖 등, 1921
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59년 조석우(趙錫愚) 고신(告身)

敎旨
趙錫愚中▣(訓)
大夫
平安道
都事

乾隆二十四年閏六月初六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