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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7년 이구징(李耈徵) 홍패(紅牌)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2+KSM-XA.1657.1100-20100731.04202224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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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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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홍패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과거-홍패
작성주체 효종, 이구징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657
형태사항 크기: 101 X 89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양월 경주이씨 양월문중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양월 경주이씨 양월문중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

안내정보

1657년 이구징(李耈徵) 홍패(紅牌)
1657년 9월 28일에 (孝宗 8) 9월 28일에 진사 이구징을 문과 을과 제4인에 급제하였음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이 문서는 문과 급제자에게 발급한 것으로 홍패라 불리며, 문서 뒷면에 ‘진사 이구징 문과 을과 제4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과는 갑과에 3인, 을과에 7인, 병과에 23인씩 배정하여 총 33인을 선발하는 것이 원칙으로 하는데, 이구징은 당시 문과 선발인원 중 7위에 합격한 것이다. 문과에 급제하면 보통 실직에 제수하거나 삼관(성균관, 승문원, 교서관)에 분관되고, 갑과 1등은 종6품, 갑과 2등과 3등은 정7품, 을과는 정8품, 병과는 종9품을 제수되었다. 또한 관품을 가지고 있던 자는 갑과는 3계, 을과는 2계, 병과는 1계씩 더 올려 주었다. 이구징은 1655년에 조부인 이경한이 진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된 것으로 인해 정9품계인 종사랑에 이미 임명되어 있었기에 2품계 위인 정8품 통사랑에 임명된다.
『경주이씨세보』, 경주이씨종친회,
『경주이씨양월문중』, 한국국학진흥원, 성심, 2009
『죽헌선생문집』, 이구징, 경인문화사, 1997
『진단학보』 71, 한우근, 진단학회, 1981
정명수

상세정보

1657년 9월 28일, 효종이 진사 이구징에게 문과 을과에 제4인으로 합격한 것을 증명하여 발급한 문과 급제 증서
[내용 및 특징]
1657년(孝宗 8) 9월 28일에 進士 李耈徵/이 文科 乙科 제4인으로 급제하였음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문과는 원칙적으로 甲科 3인, 乙科 7인, 丙科 23인을 뽑도록 하였으나 적합한 인재가 많을 때에는 더 뽑기도 하였다. 이구징은 을과 4인에 합격하였는데, 이는 전체 7위로 합격한 것이다. 뒷면 표지에는 황색 종이 위에 ‘進士李耈徵文科乙科第四人’을 한 줄로 써서 문과 급제자의 당시 신분, 이름 및 성적을 표시하였는데 문과 급제 당시 이구징은 진사의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문무과 급제자에게 내리는 합격 증서로 붉은 종이에 쓰며, 연호의 두 번째 글자 위에 ‘科擧之寶’를 찍는다.『경국대전』 禮典에 홍패에 관한 문서식이 규정되어 있다. 문과에 급제하면 보통 實職에 제수하거나 三館 즉 成均館, 承文院, 校書館에 分館한다. 갑과 1등은 종6품, 갑과 2등과 3등은 정7품, 을과는 정8품, 병과는 종9품을 제수하는데, 보통 갑과와 을과의 경우는 실직에 제수하고, 병과의 경우에는 삼관에 權知로 분관하였다. 官品을 가지고 있던 자는 갑과는 3階, 을과는 2계, 병과는 1계씩 더 올려 주었다. 이구징1655년에 조부인 李景漢이 振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된 것으로 인해 정9품계인 從仕郞에 임명되었는데, 이 해에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다음해에 다시 2품계 위인 정8품 通仕郞에 임명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01-2호에 등록되어 경주이씨 양월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다. 『경주이씨세보』에 의하면, 이구징의 조부는 이경한이고, 부는 이상일이며, 모는 아주신씨 가선대부 신한의 딸이다. 배위는 서산유씨 사인 유현의 딸로 이세석, 이세현, 이세옹, 이세정, 이세이를 두었고, 사위는 권중배와 최리기이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원창애, 『朝鮮時代史學報』 43, 조선시대사학회, 2007
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657년 이구징(李耈徵) 홍패(紅牌)

敎旨
進士李耈徵文科▣▣(乙科)
第四人及第出身▣(者)
順治十四年九月二十八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