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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년 유의하(柳宜河)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2+KSM-XA.1652.1100-20100731.0187222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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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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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유의하, 이조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652
형태사항 크기: 44 X 53.8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하회 풍산류씨 충효당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652년 유의하(柳宜河) 고신(告身)
1652년 2월 23일에 이조에서 효종임금의 명령을 받아 종6품 상계인 선교랑 유의하를 정6품 상계인 승의랑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문서발급 이유는 ‘부 전현감 유원지 황간현감 시 기6 계3 별대가병초’로 기록되어 있다. 전 현감인 유원지가 황간현감으로 재직하던 1639년 6월과 1643년 3월에 받은 2건의 별가를 그의 아들인 유의하에게 대가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통해 유의하가 선교랑보다 두 품계 높여졌음을 알 수 있고, 아울러 훼손된 글자가 ‘승’자 임을 알 수 있다. 유원지는 1638년 6월 22일에 황간현감에 임명되었다. 이 문서는 5품 이하의 문무관원에게 발급되는 교지이다. 4품 이상이 대간의 서명을 거치지 않고 왕명에 의해 바로 임명되는데 비해, 5품 이하 9품까지는 대간의 서명을 거쳐 이조, 병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발급한다. 문서식도 4품 이상 관원에게 발급하는 것과는 다르다. 4품 이상 관원에게 발급하는 고신에서 문서 첫머리에 ‘교지’를 쓰는 것과 달리 5품 이하 관원에게 발급하는 고신에는 이조나 병조가 왕의 명을 받들어 임명장을 발급한다는 의미의 ‘봉교’를 쓴다. 문서 발급에 있어서 착명은 이조나 병조의 당상관과 낭관 각 1인이 하였는데, 이 문서의 발급에는 이조참의와 이조좌랑 2명이 참여하였다. 당시 이조참의는 채유후이다.
정명수

상세정보

1652년 2월, 이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선교랑유의하승의랑에 임명하는 문서
[내용 및 특징]
1652년(孝宗 3) 2월 23일에 이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宣敎郞柳宜河承議郞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선교랑은 종6품 上階이고, 승의랑은 정6품 상계이다. ‘承’字는 문서가 훼손되어 떨어져 나간 상태이지만 유의하에게 두 번의 別加를 代加한다는 연호 옆의 부기를 통해 선교랑의 2품계 위인 승의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의하는 작년 10월 19일부터 부친 柳元之의 별가를 4차례에 걸쳐 대가받고 이번에 또 다시 2품계 위인 선교랑에 가자되어 이 문서를 발급받은 것이다. 이후로도 2차례에 걸쳐 별가를 대가받아 대가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품계인 通德郞에까지 이른다.
발급 이유는 바로 연호 왼쪽 옆에 작은 글자로 ‘父前縣監柳元之黃澗縣監三別代加幷招’라 쓴 것이 그것이다. 이는 유의하의 부친인 전 현감유원지황간현감 재임시인 己字가 들어간 해 6월과 癸字가 들어간 해 3월에 별가받은 것을 아들인 유의하에게 대신 가자하여 이번에 함께 올려준다는 말이다. 유원지1638년 6월 22월에 황간현감에 임명되었으니 기자가 들어간 해는 1639己卯年이고, 계자가 들어간 해는 1643癸未年을 말한다. 유의하는 2건의 별가를 대가받았으므로 종6품 상계에서 2품계 위인 정6품 상계로 올라간 것이다.
임명관련 교지의 경우 정기적인 인사를 통한 임명이 아닌 경우 그 사유를 문서 왼쪽 연호의 두 번째 글자 옆에 작게 내려 쓰는데, 유의하의 경우에도 정기적인 인사로 인한 가자가 아닌 부친의 별가를 대가로 받은 것이므로 그 사유를 왼쪽에 명시하고 있다. 별가는 정기 인사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가나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공을 세웠을 때, 나라의 행사에 수고하였을 때 특별히 散階를 더해주는 제도이다. 별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들·사위·아우·조카 등 누구에게나 대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대가의 폐단을 막기 위해 대가로 올라갈 수 있는 품계를 정5품 通德郞까지로 한정하였으며, 반드시 한 품계씩 올려주도록 하고 두 품계 이상을 한꺼번에 올려주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문서는 5품 이하의 문무관원에게 발급되는 敎旨이다. 4품 이상이 臺諫의 署經을 거치지 않고 왕명에 의해 바로 임명되는데 비해, 5품 이하 9품까지는 대간의 서경을 거쳐 이조, 병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발급한다. 문서식도 4품 이상 관원에게 발급하는 것과는 다르다. 4품 이상 관원에게 발급하는 告身에서 문서 첫머리에 ‘敎旨’를 쓰는 것과 달리 5품 이하 관원에게 발급하는 고신에는 이조병조가 왕의 명을 받들어 임명장을 발급한다는 의미의 ‘奉敎’를 쓴다. 문서 발급에 있어서 착명은 이조병조의 당상관과 낭관 각 1인이 하였는데, 이 문서의 발급에는 이조참의이조좌랑 2명이 참여하였다. 당시 이조참의蔡裕後이다. 관품과 관직에 차이가 날 경우에는 관직명 앞에 ‘行’과 ‘守’자를 넣어 구분하였다.
權榘(1672~1749)의 『屛谷先生文集』에는 「內舅翊贊柳公行蹟」이 있다. 이것은 권구가 내구(외삼촌)인 유의하의 행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유의하의 자는 子安, 호는 愚訥齋로 어머니는 金是樞의 딸이다. 柳袗‧鄭經世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유진에서 유원지, 유의하로 이어지는 가학을 형성하였다.
유원지는 어려서부터 조부인 유성룡의 슬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10세에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계부인 柳袗에게 배웠다. 유진은 유성룡의 아들로 이황-유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한 학자이다. 유원지의 문집인 『졸재집』은 1791년에 2권 6책으로 간행되었다.
유원지의 문집에 의하면, 그는 ‘30세에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는 응시하지 않았고 1630년에 음직으로 창락도찰방을 받은 것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1634년 통례원인의 겸 한성참군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다음해 2월에 유진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오래도록 귀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拙齋集』(『퇴계학자료총서』32~33) , 유원지, 1797
『屛谷先生文集』, 권구,
崔承熙, 『진단학보』 60, 진단학회, 1985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652년 유의하(柳宜河) 고신(告身)

吏曹順治九年二月
二十三日奉
宣敎郞柳宜河
爲▣(承)議郞
順治九年二月日
父前縣監柳元之黃澗縣監三別代加幷招
正郞
判書
參判
參議[押]
佐郞[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