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1년 10월, 이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학생 유의하를 종사랑에 임명하는 문서
[내용 및 특징]
1651년(孝宗 2) 10월 19일에 이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學生 柳宜河를 從仕郞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학생은 조선시대 품계가 없는 사람을 지칭하며, 종사랑은 정9품계이다. 발급 이유는 바로 연호 왼쪽 옆에 작은 글자로 ‘父前縣監柳元之昌樂察訪時庚七辛二別代加’라 쓴 것이 그것이다. 이는 유의하의 부친인 전 현감유원지가 창락도찰방 재임시인 庚字가 들어간 해 7월과 辛字가 들어간 해 2월에 別加받은 것을 아들인 유의하에게 대신 加資하여 내린다는 말이다. 유원지는 1630년 6월 22일에 창락도찰방에 임명되었는데 이 해가 庚午年이고, 그 다음해인 1631년이 辛未年이다. 이 문서에서 말한 경자가 들어간 해와 신자가 들어간 해는 바로 경오년과 신미년을 말한다. 유의하는 2건의 별가를 대가받았으므로 종9품이 아닌 정9품에 올라간 것이다.
임명관련 교지의 경우 정기적인 인사를 통한 임명이 아닌 경우 그 사유를 문서 왼쪽 연호의 두 번째 글자 옆에 작게 내려 쓰는데, 유의하의 경우에도 정기적인 인사로 인한 가자가 아닌 부친의 별가를 대가로 받은 것이므로 그 사유를 왼쪽에 명시하고 있다. 별가는 정기 인사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가나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공을 세웠을 때, 나라의 행사에 수고하였을 때 특별히 散階를 더해주는 제도이다. 별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들·사위·아우·조카 등 누구에게나 대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대가의 폐단을 막기 위해 대가로 올라갈 수 있는 품계를 정5품 通德郞까지로 한정하였으며, 반드시 한 품계씩 올려주도록 하고 두 품계 이상을 한꺼번에 올려주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문서는 5품 이하의 문무관원에게 발급되는 敎旨이다. 4품 이상이 臺諫의 署經을 거치지 않고 왕명에 의해 바로 임명되는데 비해, 5품 이하 9품까지는 대간의 서경을 거쳐 이조, 병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발급한다. 문서식도 4품 이상 관원에게 발급하는 것과는 다르다. 4품 이상 관원에게 발급하는 告身에서 문서 첫머리에 ‘敎旨’를 쓰는 것과 달리 5품 이하 관원에게 발급하는 고신에는 이조나 병조가 왕의 명을 받들어 임명장을 발급한다는 의미의 ‘奉敎’를 쓴다. 문서 발급에 있어서 착명은 이조나 병조의 당상관과 낭관 각 1인이 하였는데, 이 문서의 발급에는 이조참의와 이조좌랑 2명이 참여하였다. 당시 이조참의는 趙壽益, 이조정랑은 李天基이다. 관품과 관직에 차이가 날 경우에는 관직명 앞에 ‘行’과 ‘守’자를 넣어 구분하였다.
權榘(1672~1749)의 『屛谷先生文集』에는 「內舅翊贊柳公行蹟」이 있다. 이것은 권구가 내구(외삼촌)인 유의하의 행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유의하의 자는 子安, 호는 愚訥齋로 어머니는 金是樞의 딸이다. 柳袗‧鄭經世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유진에서 유원지, 유의하로 이어지는 가학을 형성하였다.
『拙齋集』(『퇴계학자료총서』32~33) , 유원지,
『屛谷先生文集』, 권구, 1797
崔承熙, 『진단학보』 60, 진단학회, 1985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유지영, 『古文書硏究』 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