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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년 이현보(李賢輔) 고신(告身)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2+KSM-XA.1543.1100-20100731.00232220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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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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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고신
작성주체 중종, 이현보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543
형태사항 크기: 48 X 84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가송 영천이씨 농암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543년 이현보(李賢輔) 고신(告身)
1543년 3월에 이현보를 가선대부 수 지중추부사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가선대부는 당상관으로 종2품 하계이고 지중추부사는 정2품직이다. 이 문서처럼 관품과 관직에 차이가 있을 경우 ‘행수법’에 근거해 관직명 앞에 ‘행’과 ‘수’자를 넣어 구분하였다. 중추부는 『대전회통』에 “일정한 사무는 없고 문무의 당상관으로서 임직이 없는 자를 우대하는 의미로 본부의 관직에 임명한다”고 규정되어 있듯이 실직은 없고 녹봉을 주기 위해 설치한 부서이다. 이 문서는 4품이상의 관원을 임명할 때 사용하는 문서형식으로 인장은 ‘시명지보’를 사용했다. 이 문서는 이현보가 1528년 3월 절충장군 행 용양위대호군에 임명되고 15년 뒤에 받은 것이다. 임명문서는 전해지지 않지만 그의 문집에는 15년의 공백기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동안 그는 군수를 비롯해 홍문관부제학, 우부승지, 경주부윤,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등 여러 관직에 임명되어 어떤 경우는 사임하고, 어떤 경우는 파직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모친과 부친의 상을 차례로 당했으며, 1540년부터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문서는 중종이 그나마 이현보의 뜻을 받아들여 내린 문서이다.
정명수

상세정보

1543년 3월에 이현보가선대부지중추부사에 임명하는 문서
[내용 및 특징]
1543년(中宗 38) 3월에 李賢輔嘉善大夫知中樞府事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가선대부는 당상관으로 종2품 하계이고 지중추부사는 정2품직이다. 이 문서처럼 관품과 관직에 차이가 있을 경우, 관품이 관직보다 높을 경우는 ‘행’을, 그 반대일 경우는 ‘수’를 썼다. 중추부는 『경국대전』에 “일정한 사무는 없고 文武의 堂上官으로서 任職이 없는 자를 우대하는 의미로 본부의 관직에 임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속대전』에는 “議政으로서 免職된 자는 이 관직에 補하되 領事判事가 정원수에 찼을 때에는 모두 판사에 임명한다. 지사同知事僉知事 등 직은 醫官譯官으로서 왕명을 받은 자를 임명하되 30개월 만기로 해임한다.”로 규정하고 있다.
이 문서는 이현보가 1528년 3월 절충장군용양위대호군에 임명되고 15년 뒤에 받은 것이다. 15년 동안의 공백기는 그의 문집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528년 봄에 대구광역시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1529년 평해군수에 임명되었다가 영천군수로 바뀌었고, 1531년에는 모친상을 당하고, 1533년에는 형조참의가 되고, 가을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곧 우부승지가 되었다. 1534년 봄에 경주부윤이 되었다가 1536년 여름에 사임하고 돌아왔다. 그해 겨울에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때 가선대부에 발탁 승급되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37년 파면되고, 여름에 부친상을 당했다. 1539년 겨울에 형조참판이 되고, 1540년에 사임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42년 봄에 병으로 사퇴하자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543년에 중종이 그 염퇴함을 가상히 여겨서 守 지중추부사에 발탁 승급하였다.’
이 문서는 4품 이상의 관원을 임명할 때 쓰인다. 『경국대전』 禮典에 ‘文武官四品以上告身式’이 규정되어 있다. 문서에는 왕의 고유 임명권한을 밝히는 ‘敎旨’를 첫머리에 쓰고, 본문에 ‘인명+爲+品階+관직+者’의 순으로 임명 내용을 기입한다. 관계와 관직에 차이가 날 경우에는 관직명 앞에 ‘行’과 ‘守’자를 넣어 구분하였다. 마지막에는 행을 바꾸어 중국연호와 발급일을 쓰고 연호 위에 ‘施命之寶’를 찍어 임명당사자에게 발급한다.
영천이씨 농암종택 고문서로 국가지정문화재에 보물 제1202(1-13)호에 등록되었다.
이현보는 이 문서를 받기 이전부터 관직에서 물러나려 했다. 그의 문집에는 ‘1540년 가을에 글을 올려 뼈라도 고향에 묻히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이에 휴가를 청하여 椒井에서 목욕하려하자 떠나는 날에 좌상 홍공이 공이 물러가기를 꾀함을 알고 임금께 공이 머물기를 청하여 임금이 인견하고 속히 돌아오기를 청하였으므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42년 봄에 병으로 사퇴하자 동지중추부사로 삼았으므로 또 병을 빙자해서 목욕하기를 청하여 배를 사서 동으로 돌아오니 그때 서울의 사대부들이 나와서 전별하였다.’ ‘1543년 중종이 그 염퇴함을 가상히 여겨서 수 지중추부사에 명하였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鄭求福, 『古文書硏究』 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원창애, 『朝鮮時代史學報』 43, 2007
『聾巖先生文集』, 이현보,
정명수,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543년 이현보(李賢輔) 고신(告身)

敎旨
李賢輔
善大夫

中樞府事

嘉靖二十二年三月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