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11월 5일에 이재명이 연보 배포를 중지해 달라고 하면서 영해 翊東[호지마을]의 재령이씨에게 보낸 편지.
1912년 11월 5일에 李在明이 연보 배포를 중지해 달라고 하면서 영해 翊東[호지마을]의 재령이씨에게 보낸 편지로, 賀淵 李仲樑의 행장에 대한 논의, 艮齋 李德弘의 묘도비 고유제 행사에 많은 인원이 모였다는 사실 등도 함께 적었다.
편지의 서두에는 상대방과 상대방 식구 및 손자들이 추운 날씨에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물었다. 이어 본인의 공부는 진중하지 못하여 문중의 바람에 부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편지의 본론에는 네 가지를 언급했다. 첫째는 하연 이중량(1504~1582)의 행장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溪' 자가 들어가는 할아버지께서 우선은 그대로 두라고 해서 그것을 상자 속에 보관한지 여러 해가 지났다고 했다. 아버지와 집안의 여러 사람은 행장을 쓰고 싶었으나 '溪祖'가 그것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어서 한탄스럽지만, '溪祖'에게 마땅히 다시 아뢸 계획이라고 했다.
이중량은 영해 인량리에 정착하여 삼벽당을 건립한 인물이다. 그는 聾巖 李賢輔(1467~1555)의 넷째 아들로, 1528년(중종 2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34년(중중 29) 문과 급제했으며, 강원도 관찰사를 비롯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두 번째는 '雲翁'이 찬한 碧梧 李文樑(1498∼1581)의 행장 끝 부분에 본인의 선조인 '구완옹'에 대한 내용이 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보지 못했으니, 이번의 인편에 베껴 보내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문량은 농암 이현보의 아들이고, '구완옹'은 李萬熻(1740∼1814)으로 자는 熙老이고, 호는 苟完齋이다.
셋째는 간재 이덕홍(1541∼1596)의 묘도비 개갈 고유제 행사에 모인 인원이 500~600여명으로 그를 흠모하는 자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묘도비의 글은 봉화 酉谷의 權相翊이 지었고, 글씨는 예안 下溪의 李康鎬가 썼다고 했다. 이덕홍의 자는 宏仲으로,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특히 심성론과 역학 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마지막은 연보 반포를 중지해 달라는 내용이다. 본인이 이미 9월 8일 溪上에 있을 때 부친 편지에 연보의 반포를 중지해달라고 했는데, 그 편지를 읽었는지 물어보았다. 연보를 반포하게 되면 상대 마을뿐만 아니라 본인의 아버지도 비난을 받을 것이니 거듭 중지해달라고 하면서, 상대방 마을로 돌아가는 객에게 이 편지를 부친다고 했다.
편지의 발급자 이재명은 이현보의 15대 종손으로, 예안에 거주했다.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12
『조선시대 간찰 서식 연구』, 김효경,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