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11월 25일 金萬植이 淸翁의 遺事와 관련하여 자료를 소집하고 정돈하는 등의 일에 관하여 상대방에게 전하는 편지
1911년 11월 25일 金萬植이 상대방에게, 淸翁의 遺事와 관련하여 자료를 소집하고 정돈하는 등의 일에 관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편지이다.
溪上에서 이별 뒤 세 번이나 갔으나 만나지 못한 회합의 어려움을 탄식하면서, 추위 속의 수신자의 건강과 자녀들의 학업에 대하여 묻고, 수신자에게 바라는 점이 많으니 이 점을 유의해 달라고 하였다. 자신은 가을과 겨울에 늘 괴롭게 지내며 겨우 생명만 유지하여 살아갈 희망은 갈수록 아득하니 겨우 세상에 붙어살며 무슨 사업이 있겠느냐고 한탄하며 한유의 送窮文이 참으로 감발하는 점이 있어 한심할 뿐이라고 하였다. 淸翁의 遺事는 아직 정돈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며칠을 기다려도 이루지 못한다면 대가의 걱정이 되지 않겠느냐며, 청옹이 평소 수신자에게 바라는 것이 어떠했으며 수신자도 청옹을 우러름이 어떠했는데 도리어 수수방관한다면 계술의 일을 亨哀가 과연 일체 맡을 수 있겠느냐고 걱정하였다. 그가 벼슬에 오른 일은 陽生에게 묻고 집에서의 일은 여러 사람의 만사와 뇌사 가운데 있으니, 숙부와 막내아우 및 모모 형과 더불어 도모하여 이루기를 기약한다면 후회가 없을 것 같다고 의견을 개진하였다. 스스로 돌아보면 청옹을 가장 자세히 알지만 수습하는 길은 절대로 적합한 사람이 아니니 또 다시 무엇을 한하겠느냐고 하였고, 또 계를 닦는 일도 자녀들이 사사로이 할 일이 아니어서 스스로 애를 쓰며 일을 이룬지 일 년이나 아직 한 사람도 이름을 붙인 이가 없으니 이것이 관연 절의를 숭상하고 의를 좋아하는 풍토냐고 되물었다. 듣지 못한 것 같아 편지 끝에 언급한다고 하면서 끝인사를 붙여 마무리하였다.
발신자 김만식(1866~1933)의 본관은 義城, 이명은 金亨一, 호는 槿庵이다. 1909년 李相龍을 도와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金東三, 이상룡 등 안동 출신 인사들이 新民會와 더불어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추진할 때 그 선발대로서 만주지역을 왕래하였다. 1910년 12월 伯父 金大洛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4월 西路軍政署 조직에 참여하여 활약하였고, 이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를 출입하며 활동하던 중 1928년 압록강 청성진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노림서원은 1649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南致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1차 작성자 : 정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