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11월 26일, 예안의 진성이씨 李晩昌이 喪中인 사돈 풍산김씨 허백당에 보내는 편지.
1907년 11월 26일, 예안의 진성이씨 李晩昌이 喪中인 사돈 풍산김씨 허백당 집안에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는 사돈 집안의 흉악한 재앙에다가 조모의 상까지 더해져 커다란 슬픔을 어찌 견디고 계신지 궁금해 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심부름꾼이 가지고 온 아들의 편지로 추운 계절에 두 분의 생활은 평안하고 상중인 형제분들의 건강도 잘 보존하심을 알게 되었으며, 이는 본인이 바라던 바에 부합한다고 했다.
이만창은 예전처럼 근근히 지내고 있으나 맏아들이 여러 달 병중에 있으며, 10여일 전에는 이름 모를 증세로 여러 번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처음의 증세는 조금 줄어든 것 같으나 머리를 들 기약은 시간을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하여 슬픔과 번뇌를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했다.
손자는 죽다가 살 방도를 얻게 되었지만 해마다 사돈집에 괴로움을 끼쳐 미안한 마음을 전했고, 시간을 아껴 공부할 나이인데 시간을 허비해버려 안타깝다고 했다. 자주 채찍으로 재촉하여 공부를 방치하지 말도록 사돈에게 당부하였다.
상대방이 보내온 편지에 내행에 관한 내용이 있었는데, 돌아가는 형편으로 말하면 늦은 감이 있지만 어른이 병들어 그날 이전에 자리에서 일어나기 어렵고, 또한 소실이 아이를 데리고 출발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듯하니 상대방이 바라는 뜻에 부합할 수 없으니, 이를 헤아려 달라고 했다.
추신에는 손자 어미의 기일이 다음달 21일인데, 그가 반드시 참석할 뜻이고 그것이 또한 자식 된 자의 당연한 정성이나 이곳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 말고 모름지기 상황을 헤아려 보아 가볍게 움직이지 않도록 해달라는 내용을 담았다.
발급자 이만창은 예안에 거주하는 진성이씨로, 그의 아버지는 李彙承이다. 韓始東·李濬九·李泰重·金相欽·李念在·柳道獻 등과 道義로써 교유하였다. 수급자 풍산김씨 허백당은 안동 풍산 오미동에 거주한다. 다수의 학자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조선후기 명문으로 성장했으며, 퇴계학파가 서애계와 학봉계로 분화되었을 때 하회의 풍산류씨와 함께 서애계를 대표하여 향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12
『조선시대 간찰 서식 연구』, 김효경,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