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안동의 柳必永이 옥산서원의 향사에 참석할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경주의 인척 형에게 보내는 편지.
1905년 5월 3일, 안동의 柳必永이 옥산서원의 향사에 참석할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경주의 인척 형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상대방이 보내온 시에 아직 답도 하지 못했는데, 오늘 상대방으로부터 편지를 받으니 경주와 안동의 삼백리에 1년의 한번 편지도 다행이라고 했다. 기력이 매우 심하게 떨어져 두 사람이 가보지 못하니 시시때때로 그립다고 했다. 상대방의 기력이 옛날보다 감소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상대방이 보낸 편지에서 조용함을 기르며 건강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포성이 바다에 울려 여러 지역이 들끓으니 조용한 가운데 거문고, 서책, 매죽을 언제까지 보존해낼 수 있을지 염려했다. 본인의 쇠잔한 몸은 나이가 들면 반드시 이르게 될 이치이기 때문에 특별히 탄식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상대방의 편지에 보이는 시끄러운 단서는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류필영은 그것이 60년 침식하던 뒤 끝에 일어났는데, 세도가 편치 못한 단서로 보았다. 도내의 논척은 그만 둘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쥐처럼 피해 구차스럽게 사는 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다고 했다.
안동에서 酒醴盛會가 있어 여강서원에 소속된 유림 800~900여명이 모이는데, 본인은 구애되는 바가 있어 참석하지 못한다고 했다. 옥산서원의 묘우에 봉안을 새롭게 하는 것은 손꼽아 기다리던 院事로 마땅히 모임이 있을 것이며, 초대 받으면 거기에 참석하여 옛날에 진 빚을 갚고 싶지만 이것은 '氿池夢[꿈에만 그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상대방이 보내준 물건을 보내준 후의에 감사한 마음을 전했고, 함께 보내준 詩도 쇠하지 않아 본인도 몇 편의 시를 써서 붙여 주어 친구로 하여금 한번 웃도록 하고 싶지만 다시 달싹거릴 수 없으니 한탄스럽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발급자 류필영(1841~1924)의 자는 景達, 호는 西坡, 본관은 전주이다. 柳致明의 문인으로, 權璉夏·李晩慤·金興洛·金道和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한일합방 이후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1919년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여 항일 의지를 확고하게 밝혔다. 3.1만세 운동에 연루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12
『조선시대 간찰 서식 연구』, 김효경,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