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5월 7일 삼계서당의 도유사 權相圭외 45명이 三溪書院의 복원에 도움을 청하는 통문
1900년 5월 7일 삼계서당의 도유사 權相圭외 45명이 三溪書院의 복원에 도움을 청하는 통문이다.
천도가 가고 나면 반드시 회복하는 운수가 있고 일월이 어두워지고 나면 다시 밝아지는 때가 있으니 인사가 폐해지면 다시 일어나는 것도 또한 이치의 필연이나, 또한 반드시 인사가 닦여진 뒤라야 운과 때도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 冲齋 권 선생을 본원에 妥享한 것은 선조 신축년으로 우리 조정이 한 번 다스려지던 때였는데, 성상이 편액을 내리고 여러 현인이 학문을 흥기하니 그 때문에 조정에는 함께 가는 현인이 있고 향당에는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는 풍도가 있어서 小華와 鄒魯의 명성을 잃지 않은 지가 300여년이나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불행히도 사문의 운수가 막혀 신미년에 서원이 훼철되는 재앙을 당하여 향사를 올리던 곳에는 갑자기 아욱과 보리가 무성한 감회가 있고 世教는 날마다 내려앉고 儒風은 땅에 떨어지니 오늘날 域中을 馴致하는 우리 선비들이 한탄하고 분개한지가 지금까지 90여년이었다고 하였다. 극에 이르면 반드시 변하고 변하면 반드시 통하는 것이 떳떳한 이치인데, 지금 사문은 이미 純坤이니 갈대재가 황종에서 나는 것도 마땅히 이때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신들은 어리석고 졸렬함을 헤아리지 않고 망령되이 어진 이를 높이고 도를 지키는 정성으로 본원을 복설하는 논의를 펴고 장인을 모으고 일을 일으켜 인사를 닦고 천운을 기다리는 도모를 한다고 하였다.
생각하니 본원은 온 나라가 모두 높이는 곳이며 백성들이 본성을 지녀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것도 고을과 나라가 같다고 하였다. 사문의 공적인 큰일을 감히 멋대로 할 수 없어 이에 고을과 나라의 여러 군자들에게 알리니, 여러 군자들은 속히 가르침을 내려주고 큰일을 함께 이루어 사문의 한줄기 양기를 지탱하고 돌이키기를 천만번 바란다고 하였다.
대표 발의자인 권상규(1874~1961)는 조선 말기 의병으로 자는 致三, 호는 忍庵, 본관은 安東이며, 沖齋 權橃의 후손이다. 을미사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으며, 1896년(건양 1)에 다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다. 경술국치 이후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 동서양의 역사를 탐독하여 당시의 국제 정세를 파악했다. 문집으로 『忍庵集』 24권 12책이 있다. 三溪書院은 1588년(선조 21)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0년(현종 1) '三溪'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51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편지 낱말사전』, 하영휘, 돌베개, 2011.12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12
1차 작성자 : 정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