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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권조영(權祚永)외 3인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1+KSM-XF.1897.4717-20090831.001525700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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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권조영, 권병덕, 권병의, 권신묵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97
형태사항 크기: 24.9 X 45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오미 풍산김씨 허백당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97년 권조영(權祚永)외 3인 서간(書簡)
1897년 4월 초 7일 권조영, 권병덕, 권병의, 권신묵이 학호선생 김봉조의 묘도비 건립에 참여하지 못하여 한 사람을 대신 보낸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대대로 맺은 교분을 보면 찾아가 함께 해야 하지만 종가집에 상례, 장례로 인해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돈 1민과 자신들을 대신할 사람 한 명을 보낸다고 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1차 작성자 : 김순주

상세정보

1897년 4월 7일, 權祚永 , 權秉悳, 權秉懿 , 權信默이 鶴湖先生 金奉祖의 묘도비 건립에 참여하지 못하여 한 사람을 대신 보낸다는 내용의 편지
1897년 4월 7일 權祚永, 權秉悳, 權秉懿, 權信默이 鶴湖先生 金奉祖의 묘도비 건립에 참여하지 못하여 한 사람을 대신 보낸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편지 첫머리는 여름에 상대방의 체후가 만중한지 안부를 묻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학호선생의 묘도비를 세우는 일은 유림에 있어서도 성대한 일이라고 하였다. 수백 년 동안 경황이 없다가 이번에 묘도비를 세우게 되는데, 그것을 담당하는 수고로움이 많을 것이라고 하였다. 권조영 외 3인은 대대로 맺은 교분을 헤아려 보면 일제히 나아가 예를 살펴야 하지만 마침 종가집의 상례, 장례로 분주하여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렸다. 이를 대신하여 한 사람을 보내지만 그 무거운 책임을 때웠다고 말할 수 없어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하며 편지를 마치고 있다. 추록으로 돈 1민을 올린다고 하였다.
이 편지의 수취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안동 오미 풍산김씨 허백당 집안에 보낸 편지임을 알 수 있다. 1897학호선생의 묘도비 건립에 많은 문중에서 축하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도 그 중 하나이다.
발급자 권조영, 권병덕, 권병의, 권신묵 은 안동권씨로 보인다. 그 중 권병덕은(1867~1944) 본관 安東이고, 자는 潤佐이며, 호는 淸菴·貞菴·又雲이다.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 孫秉熙와 함께 6만 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 당한다. 1919년 2월 25일 그는 3ㆍ1독립만세운동계획 당시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이 달 27일 崔麟, 오세창, 朴準承, 梁韓默, 金相奎 등과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서명을 열기하고 날인한다. 3월 1일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의하여 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中央教會 審計院長, 監査院長, 宣道師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朝鮮總史』, 『李朝戰亂史』, 『宮中秘史』가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1차 작성자 : 김순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97년 권조영(權祚永)외 3인 서간(書簡)

伏惟葽夏。
僉禮候萬重。
鶴湖先生墓道之竪。斯文
盛擧也。窃伏想數百年未
遑之餘。僉尊之幹當賢勞。亦
應多矣。其何以料理。得了也。
遠爲之攢賀無已。鄙等揆以
世契。卽當齊進觀禮。而適因
宗家喪葬之擾。未由遂意只
得替送一員烏。可曰塞其厚
責耶。深切愧悚。餘。不備候
禮。伏惟
僉察。
丁酉 巳月 初七日。戚生權祚永 權秉悳 權秉懿 權信默 等再拜。

靑銅一緍汗呈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