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4월 5일, 풍산김씨의 선조 학호 김봉조의 묘도비 수립에 있어 직접 찾아가 예를 다하지 못하는 것을 송구해하며 대신 부조와 편지를 전한다는 내용으로 인척관계에 있는 의성김씨 지촌 종가에서 풍산김씨 유경당 종가에 보낸 편지
이 편지는 1897년 4월 5일에 의성김씨 지촌 종가에서 오미동 풍산김씨 유경당 종가에 보낸 편지이다.
발신인인 金英鎭 ․ 金博淵 ․ 金弘植 3인은 지례리의 의성김씨 지촌 종가 사람들로 판단된다. 편지 마지막 추록에 '芝村公所' 라는 표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중 金弘植(1852~1937)은 의성김씨 31대 종손으로, 자가 健伯이고, 호가 澗西이며 부친은 宗洛이다.
첫머리는 귀 문중의 선조인 학호 김봉조 선생의 묘갈비 세우는 일이 조만간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몇 백 년 동안 도모하지 못했던 일을 이제야 이루게 된 것은 귀 문중의 정성에 의한 것이라며 감복하는 동시에 부럽다고 하였다. 뒤이어 일상적 안부를 전하였다.
다음으로 말하길 자신들은 戚生의 신분으로서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인척 관계로 연결되어 한 자손이 됨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몸 때문에 직접 가지 못하고 또 대신할 사람도 보내지 못하는 결례를 범한다며 매우 송구해 하고 있다. 그리고는 묘갈비 수립이 잘 성사되기를 바란다며 멀리서나마 약간의 정성을 보태니 자신들의 마음을 헤아려 달라고 하였다. 마지막 추록에 돈 2냥을 보낸다고 하였다.
당시 풍산김씨 문중에서는 선조인 鶴湖 金奉祖(1572~1630)의 墓碣碑를 세우는 일이 한창 추진하고 있었다. 이 편지에서는 성명이 직접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종가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1897년 4월 전후로 인근 문중에서 이 일과 관련하여 많은 편지들을 보내왔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김봉조의 이름이 확인 가능하다. 김봉조는 자가 孝伯, 호가 鶴湖이며, 증조부가 幽敬堂 金義貞(1495∼1548)이고, 부친은 悠然堂 金大賢(1553~1602)이다. 김대현은 아들 9형제를 두었는데, 이 중 여덟째만 일찍 죽고 나머지 8형제는 모두 소과에 합격 그리고 그 중 장남인 김봉조를 비롯한 5형제는 다시 대과에 합격하여 문중을 중흥시킨 인물들로 유명하다. 김봉조 修巖 柳袗(1582~1635) ‧ 溪巖 金坽(1577~1641) 등과 교유하였으며, 1601년 진사에 합격하고 1613년 增廣試 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典籍 · 司憲府監察 · 丹城縣監 · 禮曹正郞 · 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1차 작성자 : 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