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4월 6일, 이병화 외 3인이 김봉조선생의 묘도비를 세우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뜻으로 보낸 편지
1897년 4월 6일, 李秉華, 李宅銓, 李秉懿, 李秉欽이 학호 金奉祖 선생의 묘도비를 완성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뜻으로 보낸 편지이다.
편지의 첫머리에서는 학호金奉祖 선생의 묘도비를 세우는 것은 선생의 후손인 당신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하며 상대편을 위로하고 있다. 또한 선생의 묘도비를 세우는 일은 우리 사림에 있어 큰 행사인데 자신들은 병들어 칩거하고 있는 상황이라 가지 못하니 죄송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편지 끝부분에는 자신들 대신 문중의 젊은 사람 몇 명과 낙연서당의 유생을 그 자리에 참석시키겠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추록으로 우동문중과 낙연서당에서 각 돈 2냥씩을 거두어 보낸다고 하고 있다.
金奉祖(1572~1630)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豊山, 자는 孝伯, 호는 鶴湖이다. 柳成龍의 문인으로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도시직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단성현감, 경상도도사, 익산군수, 예조정랑, 사헌부지평‧성균관직강, 濟用監正을 역임하였다. 동생 金榮祖와 함께 영남지역에 문명을 떨쳤다. 이후 19세기 후손들에 의해 숭현사업이 이루어지면서 문집인 『학호집』이 간행되고 묘도비도 건립되게 된다.
발급자의 경우 자세한 정보를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편지 내용에 적혀있는 우동문중과 낙연서당을 통해 전의이씨 가문 출신으로 파악할 수 있다. 우동은 안동시 풍산읍 상리리에 속해있는 자연마을 중 하나이다. 우동 또는 우렁골로 불리는데 전의이씨와 예안이씨가 450년간 세거한 지역이다. 낙연서당은 풍산 회곡동에 세워진 서원으로 孤山 李惟樟을 主擘으로 竹峰 金侃, 涵碧堂 柳敬時를 配享으로 봉안한 곳으로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고 복원되지 못하였다. 李惟樟은 전의이씨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金侃과 柳敬時은 李惟樟의 문인이다. 이를 통해 낙연서당은 우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편지는 안동지역 양반들의 교유관계를 알 수 있는 기본 자료로서 과거 李惟樟과 金侃으로 맺어진 학맥이 풍산김씨와 전의이씨 가문 사이에 계속 유지되고 이를 통해 향촌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1차 작성자 :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