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3월 9일, 內舅가 상대방의 선조인 金奉祖의 묘도에 비석을 세우는 자리에 참석할 수 없음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1897년 3월 9일에 內舅가 상대방의 선조인 金奉祖의 묘도에 비석을 세우는 자리에 참석할 수 없음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1897년 3월 9일에 內舅가 상대방의 선조인 金奉祖의 묘도에 비석을 세우는 자리에 참석할 수 없음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김봉조(1572~ 1630)의 本貫은 豊山이며 字는 孝伯, 號는 鶴湖이다. 父는 金大賢, 祖父는 金農, 거주지는 安東‧榮州이다. 李纘金의 외손이며, 柳袗‧金坽‧金光繼 등과 교유했다. 1601년 진사에 합격하고, 1613년 增廣試 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典籍·司憲府監察·丹城縣監·禮曹正郞·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郭再祐 휘하에서 화왕산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영주의 鷗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鶴湖集이 전한다. 金尙憲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편지의 서두에서 내구는 우선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 먼 지방에서 오랫동안 소식이 막힌 것이 일상화되던 차에 요즈음에 어떠한 일 때문에 앉아서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편지로 만남을 대신해서야 비로소 先所에 일이 있어 먼 길을 올 수 없음을 알았다고 하였다. 인편이 온 뒤로 날이 많이 지났으니 그 사이에 오계의 아버지가 편안하시다는 소식은 들으셨으며, 누이의 기력이 더 심해짐은 없었는지, 온 집안 식구의 일상생활은 모두 보위 받으시며 상대방도 여러 달 담당한 학호 김봉조 선생의 묘도비 세우는 일에 애쓴 뒤 끝에 혹시 몸이 상한 단서는 없는지를 그리움을 한껏 담아 묻고 있다.
이어 내구는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있다. 자신은 졸지에 아내를 잃고나서 홀아비 상을 마쳤으나 아내를 추도함이 이루 말할 수 없고 아이들도 모두 상을 치르느라 쇠하고 어지러움에 병들어 차마 형상을 볼 수가 없음이 많아서 가련하다 하였다. 연전에 외롭게 지내던 사람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상대방이 언제 수고스럽게 왕래하겠냐며 헛되이 심력을 쓰는 것이니 좋은 계책이 됨을 알지 못할 뿐이라고 전한다.
편지의 말미에는 다음 달에 있을 돌아가신 학호 김봉조 선생님 묘도의 장사지내는 자리에 의당 나아가서 참석해야만 하는데 누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이것보다 먼저이기 때문에 그믐 전에 바로 오계를 갔다가 전회하여 그 근처에 가려 하는데 세로가 매우 험해 과연 뜻과 같을지 알지 못하겠다고 전한다. 또한 물건을 보내려고 하인을 여러 날 붙들었는데 결국 보내는 것이 없어 매우 한스럽다며 그로 하여금 이로부터 바로 오계로 떠나게 하였으나 농사철 때문에 여러 날 답답함을 고하여 자신의 집으로 지레 돌아갈까 걱정된다고도 전한다. 약간 보내는 것은 그대가 반드시 교장으로 지체 말고 보내라고 부탁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풍산김씨 유경당 간찰의 경우 김봉조 묘도비에 관련된 내용이 많다. 이 편지를 작성한 내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생몰연대는 알 수 없지만 편지의 내용이 상대방 선조의 묘도비 세우는 이야기로 정유년에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 편지도 1897년에 작성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1차 작성자 : 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