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4월 7일, 安弼濟․安弼重 등이 상대방의 선조인 金奉祖의 묘도에 비석을 세우는 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편지
1897년 4월 7일에 安弼濟․安弼重 등이 상대방의 선조인 金奉祖의 묘도에 비석을 세우는 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1897년 4월 7일에, 安弼濟․安弼重 등이 상대방의 선조인 金奉祖의 묘도에 비석을 세우는 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김봉조(1572~ 1630)의 本貫은 豊山이며 字는 孝伯, 號는 鶴湖이다. 父는 金大賢, 祖父는 金農, 거주지는 安東‧榮州이다. 李纘金의 외손이며, 柳袗‧金坽‧金光繼 등과 교유했다. 1601년 진사에 합격하고, 1613년 增廣試 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典籍·司憲府監察·丹城縣監·禮曹正郞·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郭再祐 휘하에서 화왕산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영주의 鷗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鶴湖集이 전한다. 金尙憲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편지의 서두에서 안필제 ․ 안필중 등은 김봉조의 묘도에 비석을 세워서 공적을 드러내는 것을 오랫동안 겨를이 없던 뒤끝에 懿烈을 발휘하여 내놓았으니 후학들에게 광영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유림의 반열에 있는 자들도 모두 우러러 그리워하고 공경하고 감사하게 여길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자신들은 선조부터 대대로 쌓은 교분의 두터운 친밀함 때문에 더 기쁘다고 하였다.
편지의 말미에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 또한 편지를 보내는 자신들은 김봉조의 묘도에 비석을 세우는 성대한 의식에 직접 가서 돕고자 계획했으나 모두 몸이 노쇠하고 병 때문에 예식에 참여할 수가 없어서 문중의 젊은이를 대신 보내 다만 책임을 때울 뿐이라며 미안함을 전하고 있다.
이 편지에는 돈 2꿰미를 정중히 함께 보낸다는 별지가 있다. 김봉조의 묘도에 비석을 세우는 부조금으로 보인다.
이 편지의 작성 간지는 丁酉년이다. 그러나 이 편지를 작성한 안필제와 안필중의 생몰연대를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런데 1897년 李敎英 외 1인 서간을 보면 김봉조의 묘도에 비석을 세우는 내용으로 정유년에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서간의 경우 공동 집필자인 李壽岳(1845~1927)의 생몰연대를 통해 작성 시기 추정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이 서간의 경우에도 정유년을 1897년으로 추정한다. 현재 전해지는 풍산김씨 유경당 간찰의 경우 김봉조 묘도비에 관련된 내용이 많다.
안필중은 생몰년은 미상이며, 本貫 順興, 號 斗巖, 거주지는 安東이다. 安裕의 후손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에 6년 동안 小食하였다. 만년에 정자를 지어 자손들을 양육하였다. 이수악(1845~1927)은 本貫 載寧. 字 穉崇, 號 于軒, 父 李聃榮, 거주지는 盈德 寧海이다. 權의 사위이다. 鄕試에 몇 번이나 입격했으나 會試에서는 급제하지 못했다. 1886년은 당색의 논쟁으로 4년 동안 길주에 귀양을 갔다. 1896년 2월 을미사변으로 거의한 영해 의진의 의병장으로 부대를 이끌고 안동으로 집결 중 정부의 의병 해산 권고에 따라 의진을 자진 해산시켰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저서로는 于軒集 4책이 전한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1차 작성자 : 서은주